산문

나영애 「가을 낚시」외 9편

톰소여와허크 2018. 2. 10. 09:45





신작소시집 다시 읽기

- 나영애 「가을 낚시」외 9편 / 이동훈



고흐 말년의 삶을 추적한 영화 ‘러빙 빈센트’(도로타 코비엘라 & 휴 웰치맨 감독, 2017)가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화가 백여 명 이상이 동원되어 유화 6만여 점을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했으니 놀랄 만도 하다. 실제, 영화 내내 그림 속으로, 고흐 곁으로 시공을 넘나들며 여행하는 기분이어서 영화가 끝날 즘엔 몸이 피곤해져서 아늑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감정에 오래 머물렀다.

영화 중간에 “이 보잘것없는 놈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내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다” 혹은 “나는 내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다”는 독백이 눈에 띈다. 이 문구는 고흐가 남긴 편지 내용에서 가져왔을 성싶다.

나영애 시인의 신작소시집을 읽으며 고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서시라 할 만한 「가을 낚시」와 자신의 글을 “받아 읽을 사람 있었으면”(「우체국 가는 길」중) 하는 데서 고흐의 바람이 절로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가을

입안에 굴리기만 해도

눈시울 붉어지는 계절이다


옥빛 허공에

낚싯대 드리우고 

차 한 잔 홀짝거리며 

詩를 기다린다


창밖의 은행잎

샛노랗게 물들고 

풀벌레 울음도 잘 익어

또랑또랑 한 걸 보면

시 한 수 

덥석 물어 줄만도 한데


내공 더 쌓으라는 것일까

찻잔이 다 비워지도록 

입질 한 번 하지 않는다


허탕이면 어때

노을 든 이 시간, 

정갈하게 가라앉은 내 마음

가만히 싸안고 가리라

- 「가을 낚시」 전문


「가을 낚시」에서 낚시는 시 낚시다. 강태공이 갈고리 없는 낚시 바늘로 세월을 낚았다면 시인은 스스로에게든 남에게든 읽을 만한 시 한 편을 엮기 위해 애를 태운다. 자연의 일은 “은행잎 / 샛노랗게 물들”거나 “풀벌레 울음도 잘 익어” 가듯이, 때 되면 물들 건 물들고 익을 건 익어서 저마다 “또랑또랑” 족적을 남기는 데 비해 시인은 아직 그럴 “내공”이 안 쌓였다고 겸손히 말한다.

고흐가 원하는 색채를 내기 위해 얼마만한 노력과 고통을 겪었는지는 그의 그림과 편지가 증명한다. 이후 사람들의 지지와 환호와 탄식이 고흐를 향하지만 고흐 개인으로 볼 것 같으면 그 과정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을 뿐 결실을 보지 못했다. 생전에 그림 한 점 겨우 팔았을 뿐이다. 시인은 그 길로 가고자 하는 걸까.

나영애 시인이 고흐보다 덜 절실할지는 몰라도(사실, 누구도 고흐만큼 절실할 수는 없다) 예술을 생활로 전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길에 조급한 마음도 시인은 애써 버리려 한다. “허탕이면 어때”라는 말에 여유가 느껴지지만 동시에 당장의 성취에 연연해하지 않고 득의의 작품을 낚을 때까지 일로매진하겠다는 결의도 있다. 예술에서 여유는 뭘까. 힘을 다 쏟아 붓지 않는 걸로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결국, 여유를 가지며 가는 길이 오래 가는 길이고, 즐기며 가는 길이 성취도 보람도 더 클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시에 대한 간절함과 여유, 이 두 가지는 모순개념이 아니다. 여기에 시인은 자아성찰의 자세를 하나 더 얹는다.


개울에 고인 물  

냄새 고약한 가뭄 끝에

장대비 죽창으로 쏟아진다 


시끌벅적했던

세상 입술에 자물쇠 채우고

쏴아, 힘찬 리듬이

어둠을 깨운다


보도블록, 건물들

골골이 박힌 미세먼지까지 

쫙쫙 후벼 비질한다


푸새들 말갛게 웃고

숨쉬기도 힘들었던 물고기

이리저리 뛰며 야단났겠다


편견으로 닫힌  

내 몸속의 퇴적물

혹시 쟁여 둔 게 있었나 


누런 이끼 덮이기 전

가슴 열고 장대비 밑에 누울까

창자 뒤집어 탈탈 씻어낼까


비 갠 뒤 나무들

말간 싹

한 자나 빼 올리듯

나도 맑아져야지

- 「장대비」 전문


앞서 시인이 삶의 “내공”과 그로 인한 시의 “내공”을 말한 바 있지만 이러한 내공이 단순한 지식 축적이나 기교 완성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는지, 그 과정에 자연에게, 이웃에게, 스스로에게 어떠했는지 돌아보는 자세야말로 깊은 내공이 아닐 수 없다. 장대비를 맞이하는 시인의 자세에서 그런 내공이 풍긴다.

말 많은 세상에 “세상 입술에 자물쇠 채우”듯 시원하게 쏟아지는 장대비를 시인은 반가이 맞는다. 장대비는 “골골이 박힌 미세먼지”와 같은 오염을 쓸어간다. 또한 뭇 생명의 갈증을 해소해주니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장대비의 또 다른 쓸모는 시인 자신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간 쟁여 놓은 편견의 덩어리가 장대비에 씻겨 내려가기를, 그래서 창자 속까지 깨끗해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그러하다. “편견”이란 게 이전의 경험이나 지식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한쪽에 치우쳐서, 딱지가 굳은 앎이다. 자신의 앎이 불충분한 것을 알고, 자신과 다른 입장이나 생각에 대해서 열려있어야 하며, 그렇게 해서 앎이 조정되기도 해야 할 것을 거꾸로 그 앎을 신념화해서 절대적인 것인 양 믿고 행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믿음 자체야 나무랄 이유가 없지만 상대의 믿음도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문제다.

상대의 생각이나 태도 혹은 세상일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판단하고 재단하는 기준이나 잣대에 대한 의심은 의식적으로 행하지 않으면 간과하기 쉽다. 살면서 저도 모르게 편견을 쌓게 되고, 심지어 그것이 딱딱하게 굳은 퇴적물을 쟁여 둔 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인의 감수성은 이러한 사정을 먼저 헤아리고 알아챈다. 이참에 “창자 뒤집어 탈탈 씻어낼” 마음을 내는 데서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시인의 품성을 짐작해 보게 된다.

장대비가 지나고 나무가 빼 올린 “말간 싹”은 그 자체로 귀한 생명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여기엔 이전보다 한층 성숙해진 자아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어쩌면 그런 자아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시 한 편의 모습이 이와 같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래의 시에서도 열렬한 생명과 그걸 감지하는 성숙한 자아의 만남이 있다.


깎아지른 바위에

몸 붙여 뿌리박고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


가부좌 틀고

수도승처럼 정진하는 바위틈에

실뿌리를 내렸겠지

차가운 돌 두드리고

때로는 어루만져 한 눈금씩

길을 냈으리


 

천둥 번개에도 꿈쩍 않고

눈보라 바늘 바람에도

속눈썹 내리고 도도했을 바위에

솔은 몇 십 년이나 사랑을 고백했을까 


산 아래

부드럽고 풍요로운 흙

생각나지 않았을까

절벽에서의 동행

포기하고 싶진 않았을까


낮춘 키 옹이 박히도록

바위 향한

올곧은 절개


비로소 

사랑의 길 뚫고

한 몸이 되었구나


바위도 뿌리를 감싸 안고 

달달하게 녹았나

한 알 한 알 모래가 되어 가고 있구나

- 「뿌리의 길」 전문


하필이면 벼랑이나 바위에 씨앗이 떨어져서 발아한 어린 소나무는 자기 운명을 원망했을 법하다. 한 줌 흙으로 자신이 어디까지 키를 키울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막막했을 거다. 그래도 소나무는 악착같이 바위를 잡고 없는 길로 뿌리를 내리고 내려, 마침내 제 한 몸 당당하게 서 있게 되었으니 보는 이로 하여금 생명의 경이를 느끼게 한다.

이 지난한 길을 시인은 “사랑의 길”로 돌려 본다. 사랑을 품고 바위와 동행하겠다는 소나무의 의지에 요지부동의 바위가 조금씩 길을 내어주고 끝내는 “뿌리를 감싸 안고”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바위가 제 몸을 부서뜨려 가면서 소나무를 들인 것은 소나무의 구애에 대한 화답이다. 바위와 소나무는 함께 해를 보고, 바람을 지나게 하고, 새를 맞이하는 공동 운명체로서의 생의 전성기를 쓰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 “낮춘 키 옹이 박히도록” 생존이나 구애를 위한 치열성이 없었으면 사랑의 결실도 기대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 시인도 뿌리의 길에 서 있을 테다. 뿌리를 단단히 내리는 일이 사랑을 부르는 일이고 열매를 건사하는 일이다. 시인에게 이 열매는 한 편의 좋은 시로 갈음해도 좋지 않을까.


앞서, 고흐는 “나는 내 예술로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싶다”고 했는데, 실제 그렇게 되었다. 이 단순한 사실 뒤에는 숱한 시행착오와 모진 자기반성 또, 값진 결실을 위해서 뿌리를 내리려는 안간힘이 있었다. 시인의 시편들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환기해보려고 했으나 어물쩍 지나온 느낌이다. 미흡한 감상이지만 시를 읽는 데 조금이라도 소용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끝으로, 삶을 그리고 시를 개화시키기 위해선 뿌리를 보는 개안이 필요하다고 한 줄 적어둔다.


- 월간, 『우리시』20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