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월암에서 마곡사까지 / 이동훈 이번 여름휴가엔 안면도를 다녀왔다. 안면도로 가는 길에 간월암에 들렀고, 안면도에서 나오는 길에 개심사, 마곡사를 들렀다. 절집 내력이나 풍광에 대한 기대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절집 기행을 통해서 내적 욕구나 깨달음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작가의 면면을 떠올리고 그들의 흔적을 더듬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다. 알랭 드 보통은 프로방스 지역을 여행하면서 “아를의 여행 안내소는 위대한 화가의 눈을 통해 어떤 풍경을 보고 나면 그 풍경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예술과 여행의 욕망 사이의 오래된 관계를 활용”(『여행의 기술』에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특별할 것 없는 사이프러스 나무나 흔하기만 한 올리브 나무가 여행자의 시선을 잡아매고 있다면 그게 바로 고흐의 힘이자 예술의 힘일 것이다. 간월암에 도착했을 때, 우선 생각나는 사람은 임보 시인이었다. 절 문이 닫힌 것을 보고 시인은 섭섭해 했지만 그간의 원성을 알았는지 문은 활짝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스님 대신에 오래된 사철나무가, 보살 대신에 더 오래된 팽나무가 주인 노릇을 하며 객을 맞는다. 산신당과 해신당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사이좋게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는데, 바다가 지척이다 보니 용왕신께 절하는 사람이 많다. 예전 사진에는 바다 용을 탄 여신이 해신당에 모셔져 있더니 그 사이 남신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뒷방으로 밀린 여신의 심사는 꽤나 사나울 것이다. 수년 전 이곳에 들렀을 임보 시인의 속내도 착잡해 보인다. 간월암 섬절을 물어물어 갔더니 바다가 미리 알고 물길을 열었네 마른 바다 모래 밟고 건너가 보니 절 문은 닫혀 있고 신우대만 으스스 무학舞鶴이 났다는 학돌재는 어디고 만공滿空이 깃들었던 선방은 어딘가 바다 막아 육지 만든 벽해상전碧海商田 가에 굴 파는 여인들만 옷깃을 잡는데 안개 속에 바다는 주저앉아 버리고 하늘엔 낮달도 보이지 않고 간월암 간월암 목탁 소리만 나그네 가슴속을 파고드누나 - 임보,「간월암 看月庵」전문 시인은 물때를 맞추어 작정하고 갔을 것이나 간월암은 절 문을 닫고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바다가 문이니 따로 절 문이 있어서 닫아 놓을 것 같지는 않지만 실제 그랬다면 절은 섬에 들어 갇히고 문을 닫아 또 한 번 갇힌 꼴이다. 무학이 있을 때 절은 바깥을 향해 열려 있었을 것이고, 만공이 있을 때도 절은 안팎으로 열려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없는 사람이 되었다. 무학이 바라보았을 달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전설과 전설의 소문을 그리는 사람에게 상업화된 주변 풍경이 좋게 비칠 리 없다. 작정하고 찾았던 것이 기대에 못 미치는 가운데 “닫힌 문”은 서운하고 쓸쓸하기까지 했을 시인의 내면을 들추어내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임보 시인의 「간월암」 낭송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가슴속에서 나오는 육성으로 “가너람 가너람(간월암 간월암)……” 외울 것 같으면 어떤 존재든 삶의 우여곡절과 지향 여부를 떠나 조금씩 피안(간월암의 원래 이름이 ‘피안사’彼岸寺라고 한다)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음을 떠올리게 된다. 설령, 무명을 벗겨 줄 지혜의 달이 가까이 있다 하더라도, 끝 간 데 모를 세월과 운명 앞에 간월암도 수도승도, 그대도 나도 점멸하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간월도는 낙조와 철새로도 유명하다. 황동규 시인은 이 둘을 같이 누리는 호사를 누리지만, 그가 보는 아름다움은 처연한 데가 있다. 영하 11도 하늘도 땅도 시퍼렇다. 한 줄 길게 두 줄 짧게, 그 뒤론 한쪽 길고 다른 한쪽 짧은 쐐기 모양 흐트리지 않고 허공을 건넌다 죽음같이 텅 빈 겨울 하늘에 황홀한 좌표 그리는 저 선들! 인간의 행로보다도 정연한 저들의 행로가 인간을 하늘에 줄 서게 만든다. 선들이 휘돌며 성긴 눈발로 내려와 목을 감는다. - 황동규,「겨울 간월도에서」전문 황동규 시인은 겨울 간월도을 찾았다. 시 발표년도를 보니 공교롭게 아이엠에프 경제 위기를 겪던 시절이다. “영하 11도”의 한파가 가장의 손을, 식구의 입을 얼어붙게 했을 걸로 미루어 짐작할 여지를 준다. 기러기 군무라고 할지 비행이라고 할지,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시인이 포착한 것은 누가 누구를 소외시키는 일 없이 다 함께 “허공을 건넌다”는 점이다. 기러기가 보여주는 세상은 돈이 많거나 힘이 세다고 해서 특권이 인정되는 사회도 아니고, 돈이 없고 힘이 약해서 더 많은 희생을 강요당하는 사회도 아니다. 그래서“내 성대가 기러기 소리를 낸다”는 것은 소외된 이웃에 대한 동화 내지 연대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무리 추운 시대라 하더라도 평등한 가난은 견딜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파이를 키워야 나누어 갖는 것도 많다는 논리를 부정할 이유는 없으나 가난한 가운데 적은 조각을 나누는 마음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 싶다. 겨울 간월도를 상상하기엔 해가 너무 쨍하다. 서둘러 편안한 휴식을 그리며 안면도(安眠島)로 갔다. 무릎 높이에서 넘실거리는 바닷물과 꽃게에 정신이 팔린 두 아이는 암만 놀아도 지치지 않는다. 인근에서 1박 후 자연휴양림과 수목원을 산책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천상병 시인의 서울집을 옮겨 온 문학관이 반대편에 있는 줄 알지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좌우로 펼쳐진 바다와 갯벌을 보면서, 국도를 얼마간 더 지나 해미읍성을 돌아 개심사로 향했다. 개심사 가는 길 문득 한 소식 하려는가 나무들 서둘러 흰 옷으로 갈아입는다 추위를 털면서 숲 속으로 사라지는 길도 금세 눈으로 소복하다 여기에 오기까지 길에서 나는 몇 번이나 개심改心하였을까 한 송이 눈이 도달할 수 있는 평심平心의 바닥 그것을 고요라고 부를까 하다가 산문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본다 어느 자리, 어떤 체위이건 눈은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不平마저 부드러운 곡선이다 설경이 고요한 듯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허지만 송송 뚫린 저 오줌구멍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마을의 개구쟁이들이 저지른 저 고요의 영역 표시 경계 앞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심放心 뒤에 진저리 치던 나의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 하물며 개심開心이라니! 그 구멍의 뿌리 모두 바닥에 닿아 있으므로 길은 불평의 바닥이다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그러니 애써 한 소식 들은 척 하지 말자 눈이 내렸을 뿐 나는 아직 고요의 입구에 있는 것이다 - 신현락,「고요의 입구」전문 신현락 시인이 개심사를 찾았을 때도 겨울이었나 보다. 소복이 쌓인 눈을 밟으며 시인은 스스로 불평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불평이란 기실 작은 구멍에 불과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불평은 바닥과 닿아 있고, “불평하지 않으며 길을 다 갈 수는 없다”는 구절에 이르면 그 말의 무게에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한자어 평(平)은 좌우가 대칭인 저울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불평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지만 어떻게 보면 다시 균형을 잡기 위한 과정이기도 할 테다. 중심을 잡기 위해 흔들리는 것이 필요하고, 평정을 위해 불평이 있어야 하는 이치를 생각하면, 자신의 불평에도 수용할 건더기가 있는 것이고, 남의 불평에도 귀 기울여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평심(平心)도 멀고 개심(開心)도 아니라지만 고요의 입구를 기웃거리는 심정으로 절집 앞에 서니 연못이 놓여 있고 그 앞으로 잘 자란 나무들이 형님 아우 하듯 서 있다. 팽나무, 전나무, 벚나무, 서어나무 등등과 나무다리 건너편의 배롱나무까지 누구 하나 꿀리지 않고 어엿하다. 대웅전 앞마당으로 들어서 무량수각 마루에 앉아 심검당을 보는 시간이 즐겁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의 주춧돌, 매끈하거나 단정하지 않은 굽은 기둥이 아직도 한 호흡 하며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것 같다. 심검당에 마음을 빼앗긴 변해명 수필가는 이렇게 말했다. 휜 기둥일망정 그저 다듬어지지 않는 투박한 주춧돌일망정 그므개로 금을 긋는 그랭이질을 잘 한 결과로 보인다. 어수룩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아 기울 것 같은 받침돌 위에 굽은 기둥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세운 도편수의 솜씨는 돌과 나무가 만나는 숨겨진 연결의 절묘한 만남을 엮어낸 기술에 있을 것이다. - 변해명, ‘주춧돌과 기둥’중에서 (『우주목과 물푸레나무』) 주춧돌과 기둥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뒤 수필가와 인연이 있었던 박목월과 김동리를 한국문학의 주춧돌과 기둥으로 내세운다. 나무와 돌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람에게 옮겨져 누군가를 오롯하게 기리는 마음이 좋게 와 닿는다. 개심사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을 물으면 이범철 시인의 시를 내밀고 싶다. 마음을 열어 씻어보겠는가 그렇게 씻고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개심사 뒷산에서 수십 년 몸을 닦고 굵은 팥배나무가 이룬 것은 잎을 뱉어 비탈에 그늘을 깔아 놓은 일, 누구는 청벚꽃을 보러 간다고 하고 누구는 산대나무 도 닦는 소리 들으러 간다고 하고 해우소 가는 밤길은 멀고도 아름다운데 길 끝 해우소 깊은 속은 내려다보기만 해도 근심덩어리가 풍덩풍덩 빠져나간 것 같다 심검당 배흘림기둥이 품어온 수백 년은 아직도 푸르기만 하다 팥배나무 아래 부서진 햇빛조각들 흘러가려는 곳은 어디인가 청벚꽃 피우던 봄바람이라도 담아갈까 개심사에 가거든 차마 내려오지 말 것, 빈 마음으로 그렇게 세상에 오지마라 무서운 사랑이다 개심사 돌계단은 오를 때뿐이었다는 것을 내려올 땐 잊을 수 있을까 이제사 그대가 갇힌 문을 밖에서 닫는다 - 이범철,「개심사」전문 개심사로 오르려면 팥배나무 그늘에 앉았다 갈 일이고, 해우소에서 근심 하나 내릴 일이다. 심검당 기둥에 기대어 뜨거운 머리를 식히면 좋고, 명부전 지나 벚나무 아래에서 꽃을 흔들던 봄바람의 흔적까지 더듬을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아무리 마음을 씻고 다잡아도 앞서 신현락 시인이 그랬듯이 평정심이 가당키나 한가. 이범철 시인은 한 술 더 떠서 “그렇게 씻고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며 지나온 이력을 바탕으로 세상살이가 만만찮음을 슬쩍 내비친다. “그대가 갇힌 문을 밖에서 닫는다”는 표현에 이르러서는 당혹스런 느낌도 없지 않다. 개심(開心)이니 열어야 마땅한 것인데, 그대를 안에 두고 묻을 닫는단다. 여기서 “그대”는 지난 사랑과 집착일 수도 있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일 수도 있으려니 싶다. 박원혜 시인은 위 시를 소개하며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는 문은 이미 열고 닫히는 것에 대하여 크게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했으니 열려고 닫으려고 무던히 애쓰는 인생 자체를 관조한 말로도 들린다. 푸른빛이 돈다는, 아니 보는 사람마다 색을 다르게 본다는 명부전 벚꽃을 굳이 상상하지 않더라도 벌써 몇 개의 잎이 단풍 드는 걸 보니, 잎잎이 색색이 다른 줄 알겠다. 개심사를 지나는 사람의 무늬도 제각각일 것을 생각하며 마곡사 방면으로 방향을 잡는다. 마곡사 가는 길은 일주문에서 해탈문, 천왕문 지나 대광보전 마당까지 잘 닦여 있는 데다 내왕하는 이가 적잖다. 고요한 산사를 그리는 마음으로 보자면 살짝 실망일 수도 있겠으나 그리 섭섭하지는 않은 것이, 큰 나무가 그늘을 깔아 주고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가 개심사 가는 길 못지않게 사람 마음을 끌기 때문이다. 한쪽 측면에 심검당을 두면서 시작되는 사찰 배치도 개심사와 비슷하나 좀 더 몸집을 불려놓아 전체적으로 시원시원한 느낌을 준다. 마당 가운데 오층석탑은 라마탑의 머리 장식을 보여 주어 이방인을 마주하는 듯한 어색함이 있는데 어쩌면 괜한 선입견일지도 모른다. 어떤 개성이든 혹은 고유한 특징이든 간에 이쪽과 저쪽이, 이 지역과 저 지역이, 이미 있는 것과 아직 없는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섞이는 가운데 발현된다고 보면 더욱 그렇다. 박라연 시인이 이곳을 찾았을 때 누군가 이 석탑을 돌면서 소원을 비는 중이었을 것이다. 한쪽 귀퉁이에 쌓아 올린 돌탑에 돌 하나 더한 뒤에 합장배례하는 풍경을 보았을 수도 있다. 사실, 마곡사는 대웅보전의 안의 싸리나무 기둥(실제로는 느티나무라고 함)을 돌아야 더 영험하다는 소문이 있지만, 어디든 소원을 비는 그 간절함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탑돌이를 한다. 마음의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으리라. 해탈문을 지나 천왕문을 지나니 오장육부가 약속처럼 빠져버린, 온몸이 물 한 점 없이 텅텅 비어버린, 늙은 살가죽도 반의 반쪽만 남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된다. 그가 올 봄에도 어김없이 피워 올린 공중의 새순들은 무엇으로 얻었을까 오늘은 서까래 몇 개라도 올려야 한다. 목탁 소리 독경 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 계곡 속의 피라미마저 귀가 쫑긋해서 온갖 교태를 부리며 튀어오른다. 지금 행복하다면 오히려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지금 힘이 들면 빚을 갚거나 저축을 하는 것처럼 편안해진다. 그 마음들 모아서 토담처럼 쌓아올리기 위해 돌고 돌아야 한다. 탑돌이 하는 여자 발밑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 새하얀 클로버 꽃장들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행운의 부스러기들이 피운 꽃이라면 기와 몇 장 연등 몇 개조차 바친 적 없지만 이쯤에서 돌아가도 마음의 거처 얻을 수 있으리라. - 박라연,「마곡사」전문 “절망이 닥칠 때보다 행복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더 불안해한다. 그것은 행복에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이기와 시인의 평에서 보듯이“행복”하면 걱정이 되고“힘이 들면”오히려 마음이 편하다는 말이 가만가만 제 안에 수용되는 느낌이다. 고정불변의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경구를 대지 않더라도 좋았던 순간이 계속되지 않는 걸 경험적으로 안다. 고통스러운 순간도 매한가지다. 그러니 행〮․불행에 마음을 너무 쓰지 않도록, 마음이 매이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거라는 말씀을 자주 듣는다. 고통 속에 자신을 성숙시키거나, 남을 도울 수만 있다면, “빚을 갚거나 저축을 하는” 생산적인 결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기와 시인은 이곳 마곡사에서 한때를 같이 했던 오래전의 인연을 떠올리는데 그때까지 수습되지 못한 감정의 결이 남아 있었나 보다. 언 눈물인 양 창밖에는 눈발이 휘날리고 멀리 절간의 목탁 소리 안개처럼 밀려오는 그날 밤, 밤새 우두커니 앉아 생의 슬픔과 기쁨을 다 알아버린 듯한 나, 그날의 나는 누구인가? 지금 어디에 가 있는가? 어디에 - 이기와, ‘마곡사에 내린 사랑의 폭설’중에서 (『시가 있는 풍경』) 마곡사는 추억을 간직하게 하고 또 지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수도했던 김구 선생은 광복 후 다시 찾아와 옛일을 회상하며 향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번 여름에 그 향나무 아래 가족사진 한 장을 남겼다. 언제 다시 마곡사를 찾게 된다면 같은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아니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질문이 벌써 와서 맴돈다. 그날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나는 여름 마곡사를 추억할 것이지만 이기와 시인은 겨울에, 박라연 시인은 봄에 다녀가면서 추억할 거리를 남겼다. 또 누군가는 가을 마곡사를 찾아 상념에 젖을 것이다. 앞서 간 사람의 흔적을 한 권의 책, 한 권의 시집으로 추억하며 동행하는 것도 퍽 의미 있는 일이겠다. 앞서 인용한 황동규 시와 박라연의 시는 이기와 시인의 『시가 있는 풍경』에도 인용되었으며, 이 책이 이 번 여행의 동인이기도 했음을 밝혀 둔다. 마곡사는 이재부 시인의 시 같은 수필 한 편도 떠올리게 한다. 인생살이에 지우고 싶고 비우고 싶은 말이 한 둘이겠는가. 버리려하여도 되살아나는 슬픈 언어들이 묵은 낙엽같이 쌓이는 것을……. 수없이 떨어지는 낙엽의 떨림에 귀 기울인다. 원망도 기쁨도 아닌, 그저 살다 사라지는 낙엽의 언어를 듣는다. 평화를 전도하는 자연의 시어에 넋을 잃으며 발길을 옮긴다. 슬퍼하지 마라, 기뻐하지도 마라. 감정의 색깔을 지우면 과거도 미래도 현재의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나를 찾으리. 저 자연의 길고 긴 서사시를 줄줄 외우는 낙엽의 언어들. 나는 늙어도 못하는 일을 저 낙엽은 하고 있구나, 나는 늙도록 못해본 일을 그대 낙엽은 하고 있구나. 만취(滿醉)의 석양을 곱게 뉘이고 속삭이는 낙엽의 사랑. - 이재부, ‘낙엽의 언어’중에서 (『강으로 지는 노을』) 시인이 지우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시인이 걸어 올랐던 백련암 쪽을 보며 사진에서 보았던 개구쟁이 마애불을 떠올린다. 맵시 있고 위엄 있고 잘 생긴 여느 부처와는 다르게 오가는 길에서 만나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조금 못 생겨서 더 편한 부처다. 아마도, 저쪽 어디에서 저를 닮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을 것이다. 이재부 시인이 마애불 앞에서 지우고 싶었던 말은 감정의 색깔을 갖고 있다. 어쩌면 그 감정은 오랜 세월을 통해 마음의 무늬를 만들어 왔을지 모른다. 그러니 그걸 내려놓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시인에게 저마다 감정의 색깔을 지우고 분분했을 낙엽이 수도자의 모범이요 인생의 고수로 비치었을 법하다. 낙엽의 언어를 알아듣는 사람, 또 그 언어를 끝내 사랑으로 번역하는 마음을 가을 마곡사에 가면 다시 주울 수 있을는지. 절 마당을 돌아 나오는 길에 명부전이 보인다. 머지않아 계절이 갈려 가겠지만 단풍나무 잎도, 은행나무 잎도, 보료처럼 깔린 질경이도 아직 푸르기만 하다. 명부전 안으로 들어간 아이들이 한동안 나오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간월암 해신당에서도, 개심사 명부전에서도, 마곡사 대웅보전에서도 뭔가를 골똘히 빌고 나왔다. 소원을 빌고 나오는 아이 얼굴이 시 한 편인데 당최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작가의 눈을 통해 포착된 풍경을 깜냥껏 풀어 기술하는 것으로 이번 여행을 정리하려고 한다. 어느 날엔가 그때의 풍경 하나가 말을 걸어올 것을 기대하면서. (2013. 10) - 임보,「간월암 看月庵」전문 (『눈부신 귀향』,시와시학,2011) - 황동규,「겨울 간월도에서」전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문학과지성사,2000) - 신현락,「고요의 입구」전문 (『히말라야 독수리』,북인,2012) - 이범철,「개심사」전문 (《우리詩》2010. 1) - 박라연,「마곡사」전문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문학과지성사,1996)
저런, 저 철새들
저 중에는 과부 홀아비 고아도 왕따당한 자도 노숙자도……
내 성대가 기러기 소리를 낸다
간월암 앞
간월암 해신당
개심사 명부전
개심사 연못
마곡사 명부전
마곡사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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