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검객의 등장과 우수검법
-박승류, 『맷집』 / 이동훈
1. 햇살검객의 등장
햇살은 가끔 날이 설 때가 있다
날을 세워 다가올 때가 있다
칼날처럼 날이 선 햇살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리고 어쩌다, 깊숙이 베일 때가 있다
칼날은 계절마다 다른 검법으로 다가온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폭염검법에
차갑게 부서지는 혹한검법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춘추검법까지도
모두 경험을 해 봤다
칼날에는 칼잡이의 혼이 들어 있어, 어떨 때는
한번 휘두른 칼날에 가슴을 철렁 베일 때가 있다
또 어떨 때는 마음이 동강날 때도 있다
모르는 사이 눈동자를 쓱싹 베일 때도 있다
우멍한 눈을 파고드는 우수憂愁검법은
춘추검법의 한 지류이지만
오랜 기간 숙련되어 으뜸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나는 우수검법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불혹을 지나 지천명으로 가는 길에
아차, 또 만나고 만 햇살검객
피할 방법을 찾지 못 했다 오늘도 나는
눈이 베였다
말간 피로 눈동자를 씻었다
배후는 늘 허공이었다
- 「햇살검객」 전문
햇살검객은 박승류 시인의 데뷔작이다. 검객의 칼날이 가슴을, 마음을, 눈동자를 베일 때 ‘나’는 말간 피를 흘린다고 했다. 피는 자신을 정화시킬지언정 흔히 환기되는 죽음이나 공포의 흔적과는 거리가 멀다. 햇살을 무기로 삼았으니 그럴 것이고 그 배후에 봄가을 하늘이 있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햇살검객은 부신 햇살만큼이나 낭만적인 이름이지만 상대를 겨냥하여 칼날을 순식간에 뻗치는 절정의 기술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독자에게도 매력적인 대상이지만 그런 햇살검객을 만든 장본인인 시인 역시 햇살검객을 왜 흠모하지 않겠는가. 실제 박승류 시인은 무협 만화에 나오는 검객의 인상을 진하게 풍긴다. 시인의 몸이나 눈에 검광(劍光)이 번득이는 걸 느낀다. 물론, 주관적인 느낌이지만 햇살에서 검객을 느끼는 것이 시인의 기질과 무관한 우연적인 일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때든지 강호가 조용한 날 있었을까. 검을 들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세상은 검을 녹슬게 놓아두지 않는다. 이순신 장군은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一揮掃蕩 血染山河)는 문구를 장검에 새겼고, 최제우 선생은 ‘검결’에서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라고 했으니 검의 쓸모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것이라 하겠다.
햇살검객의 후예인 박승류 시인의 칼도 허공만 가르지는 않는다. 다만, 베어야 할 분명한 대상이 있던 시절과 다르게 세상은 복잡하게 얽혀서 베어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이 섞여 있으니 칼의 주인은 그만큼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2. 욕망을 베다
구조를 바꾼다는 건 그 무게를 줄인다는 말
점잖게 구조조정이라 하지만
당신 머리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와 같지
목에 빳빳이 힘을 준다고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복잡한 생각을 모조리 털어내는 것으로
얼른 무게를 줄여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망이·망소이와 임꺽정, 그리고 전봉준도
눈치껏 무게를 줄였다면 명을 재촉받진 않았겠지
하기야 예수도 그렇긴 해
오직 상대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집중했다면
더 긴 시간 두통과 멀미를 앓았겠지만
- 「머리」 부분
이번 시집의 단연 눈에 띄는 특징은 눈 코 귀 입에서 팔 다리까지 인체의 모든 부위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얘깃거리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물론, 인체는 단순 재료일 뿐이며 세상에 대한 인식, 그에 따른 긍정과 부정의 요소를 돌올하게 그려낸다. 부정적인 것에 대해 바로 칼 맛을 보여주는 대신에 특유의 시니컬한 어조로 한 번 더 상황을 생각하게끔 하는 배려(?)도 잊지 않는다.
위 시에서 ‘머리가 떨어지는 것’과 ‘구조조정’을 동일시함으로써 노동자에게 실업은 존재의 생명을 위협받는 것과 같다는 인식을 보여 준다. 다만, 진술되는 시인의 언어는 절박함보다는 조금은 유희적인 느낌을 준다. ‘머리가 떨어지는 것’은 ‘무게’를 지녔기 때문이고, 그 무게를 스스로 줄이려는 시도가 있었으면 어땠을까하면서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바꿔 버린 것이 그런 느낌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오해를 또 한 번의 비틀기로 피해 간다. “오직 상대가 원하는 방향”과 자신의 욕망을 일치시키는 것에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는 것이다. 자본가나 권력자나 힘 있는 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경도되는 것은 “두통과 멀미”를 부르는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시인의 칼이 겨누는 대상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헛된 욕망은 일그러진 사회의 책임이기도 하고 개인 궁상이 그러하기도 할 텐데, 아래 시에서 그런 현실의 단면이 잘 포착되어 나타난다.
그의 조직은 중심이 아닌 변두리, 주로 지방조직이다
포화지방, 불포화지방, 트랜스지방·······
지방조직의 하나인 인지질은 세포막의 중요한 구성성분으로 활용되어
중심의 체온 유지에 지대한 역할을 하지만, 지방은 역시 지방
“중심이 되지 못하면 퇴출된다, 도태되느니 자폭한다”
그의 생각이다
그는 늘 영역 확장을 꿈꾸고, 그는 늘 중앙무대를 꿈꾸지만
그들의 서식지는 동일하다
계係, 파派, 사단師團의 보스가 되려는 욕망 또한 다르지 않다
- 「맷집」 부분
이 시는 ‘몸의 지방’과 ‘중심에서 소외된 지방’을 기발하게 연결한 작품인데 중심이 되고자 하는 지방의 욕망을 쓸쓸하게 돌아보게 하는 한 편의 블랙 유머에 가깝다.
중심에 연결된 자신의 쓸모를 아는 사람은 주변에 처해 있어도 이미 자기 중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반면에 스스로 중심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엿보며 “영역 확장을 꿈꾸고”, “중앙무대를 꿈꾸지만”그들이 놓인 바닥은 불평(不平)일 가능성이 크다.
이 시에 물음표를 하나 던진다면 “보스가 되려는 욕망”과 “맷집”의 상관관계다. 맷집을 키우라는 신호로 읽거나, 맷집만 좋아서 무얼하냐는 의미로 읽거나 그건 독자의 자유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맷집은 얻어터질수록 강해지지만 욕망은 커질수록 가난해진다는 것이다.
내지 않으면 좋았을, 나와 남을 해치는 욕망이 마수를 뻗쳐 온다면 그 근원을 베는 게 검객의 기본자세일 것이다. 욕망을 다루는 시인의 칼은 단도직입적은 아니더라도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박승류 시인의 시는 말할 것은 말해야 하고, 벨 것은 베야 한다는 시인의 기질을 닮았다.
3. 권위와 불통을 베다
엄격한 그는 한 치의 오차마저 없애려 늘 안간힘을 쓴다
매일 좌우로 왕래를 반복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촌지를 삼키는 것도 균형감각을 유지하기 위함이냐고
다시 두 무리가 동시에 침 튀기며 삿대질했다
회색이라고, 회색은 결코 좋은 색이 아니라 했다
줏대 없는 것은 무골동물과 다름이 없다 했다
회색도 되지 못하는 너와 절대 같이 할 수 없다고
또 다른 한 무리가 침 튀기며 손가락질했다
온갖 소음과 침은 벽을 걷어차며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충격이 벽에 틈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는 비틀댔다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는 그가 자리에 멈췄다
- 「벽시계」 부분
이 시는 좌우로 흔들리는 시계추와 좌우의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현실세계를 대응시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좌든 우든 자신이 중심이 되어 세상을 이해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문제는 다른 한쪽을 또 다른 중심으로 여기지 않는 데 있다.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불쾌해 하면서 상대를 ‘편향적’으로 몰아붙이는 데는 주저하지 않으니 세상은 늘 시끄럽다. “회색도 결코 좋은 색이 아니라”는 것에서 보듯이 니편 내편의 만연한 편 가르기는 나름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려는 중간자의 위치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기도 어렵고,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는 그”는 다양한 입장과 유연한 선택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이 시대의 자화상이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타인과 세상을 향해 눈과 귀를 열어 두지 않고 자신의 입지만 강화하려 했던 이유가 크겠으나, “그가 다시는 스스로 열리지 않는 것도/ 매일 만나게 되는 소리,/ 대부분은 어디에도 쓸모없기 때문이다”(「귀」 부분)며 사회적 공기에도 적잖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시인은 파악하는 듯하다. 소통을 방해하는 이런 문제가 구조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일 수 있음을 비치기도 한다.
제도권 밖의 베란다가
제도권의 거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제도권의 일상이 못마땅하다는 당신의 생각도
베란다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거실에 강제 편입된 베란다 역시 곧 실망을 배울 겁니다.
벽이란 허물어지기 위해 있는 것이라 해도
허물어질 위치에 있지 않은 벽 또한 존재 이유가 있을 겁니다.
허물어져서 좋은지 나쁜지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겠지요.
당신과 나 사이에도 벽이 있습니다.
모습이 보인다고 벽이 없는 것은 아닐 테지요.
- 「베란다」 부분
이 시는 거실과 베란다를 제도권과 비제도권으로 구분한 재미난 시다. 여기서 “벽”은 소통의 부재를 말하는 단순한 장치, 그 이상이다. “벽 또한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전언을 흘려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베란다의 의사를 묻지 않고 벽을 트는 일만 능사는 아니다. 충분한 소통 없이 강제로 편입시키는 것의 부작용을 경계하는 시인의 의도가 읽히는 장면이다.
제도권이라 해서 혹은 제도권 밖이라 해서 더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한쪽을 일방적으로 거들거나 다른 한쪽을 허물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시인은 삐딱해지고 싶은 것이다. 잘못된 권위와 그로 인한 불통에 맞서려는 시인은 지금도 칼날을 벼리고 있을 것이다.
4. 다시 햇살로
박승류 시인은 뒤늦게 시의 세계로 진입했다. 박승류 시인의 독학해서 시의 지경을 넓혔으나 굳이 파를 따지자면 주류는 못 되고 이름에서 보듯이 ‘이기는 류’(실제 이름은 勝流가 아니라 勝琉임)다. 늘 이기면 좋겠지만 인간관계의 셈법에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등식이 있음을 시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보수적이고 고집이 센 선비들이 즐비한, 그러면서도 독립운동은 가장 치열했던 안동을 시인은 본향으로 두고 있다. 그쪽 어른들은 부당한 것에 대한 직언과 저항운동에는 뒤를 두지 않는 성미지만 타협과 절충에는 인색한 면이 더러 있다는데 시인이 그런 기질을 다분히 이어받았을 성싶다.
이제, 시인과 검객은 둘이 아니지 싶다. 잘 나가는 자, 힘 있는 자, 가진 자를 위해 칼을 쓰는 것은 하수일 테고 소외된 자, 지는 자의 편에 서서 스스로 칼이 되는 용맹이 고수의 길일 것인데 예의 「햇살검객」에서 우수검법을 최고의 기술로 간주한 시인의 마음을 높이 사고 싶다.
아래 「구두」는 우수검법으로 요리한 시다.
전생이 소였던, 나란히 선 구두의 발목을 보면
우멍한 소의 눈을 보는 것 같다
눈을 끔뻑거리며 쟁기를 끌고 가던 지난날의 소가
환생을 해서 콧김을 뿜으며 현관에 누워 있다
아침이면 은근히 재촉하는 소를 따라
매일같이 생존이라는 봇짐을 지고 길을 나선다
그때마다 그는 나직나직 소를 달래며 걷는다
급하지 않아 급하지 않아 오늘은 모두 다 잘될 거야
잠시 발걸음을 멈추는 소, 문득
여물통이 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밭머리에 서서 먼 산을 한참이나 올려다본다
골목골목 긴 밭이랑에 발자국을 찍어가며 다녀야 하는
계단식 논밭을 오르내리며 쟁기질을 해야 하는
새로운 자신의 일이 생소했던 그날, 처음의 밭이랑은
참으로 길었던 것이야, 눈을 감았다가 뜬다
사래 긴 밭으로 가서 오늘은 기어이
성공을 하고만 싶은 외판(外販)을 위해 그는
빼곡히 적힌 방문 예정 고객명부를 또 다시 펼쳐본다
밭을 갈 듯 다시, 소처럼 차곡차곡 걸어가던 그
파종을 하고 거두어들이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바뀐다
서걱이는 발걸음으로 밭이랑을 헤쳐 나가듯
그의 일생은 늘 소처럼 걷는 것이다
어두워지면 잠시 쉬었다가 아침에 또 들로 나가는
눈이 더 깊어진 소 한 마리
이어지는 무실적으로 깊게 패인 수심(愁心)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
- 「구두」 전문
‘소걸음’이란 단어가 주는 인상은 부지런하지만 바쁠 건 없다는 것이고 외곬으로 한 길로 걷는다는 것인데 시인의 생각은 사뭇 현실적이다. 소걸음과 외판원의 지친 걸음을 겹쳐 보면서 견디어야 할 삶의 무게를 생각하게 한다.
소가 갈아야 할 밭이랑은 끝이 없고, 외판원이 다녀야 할 골목은 길다. 어두워서야 구두를 벗겠지만 “무실적으로 깊게 패인 수심(愁心)”을 대신 입으니 낮이나 밤이나 그냥저냥 사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닌 것이다. 일상인의 고단한 하루를 곡진하게 그려낸 이 시는 강한 내공이 느껴지지만 검기(劍氣)는 감추어져 있으며 오히려 따스한 연민으로 시상을 마무리하고 있다. 칼 이면에 있는 시인의 진정이 이런 것이리라 짐작해 본다.
흘려들은 말에 의하면 칼집에서 칼을 빼지 않을 때가 더 두렵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박승류 시인과 칼은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햇살검객의 무기는 햇살뿐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어떤 검객이 오든 맷집도 없이 함부로 베이는 건 삼가야 한다. 햇살검객의 부드러운 검결(劍訣)로 이런 걱정을 불식시켜 주기를 바라며,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초식도 아무쪼록 유쾌하게 감상되길 비는 마음이다. (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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