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 혹은 인텔리 / 김혜순
나무를 얇게 벗겨 만든 종이
종이로 만든 책
나는 벽에 기대앉아
한 장 한 장 종이를 뜯어먹는다
나무 한 그루를 발가벗겨
입에 쑤셔넣는다
보리로 만든 술
키 큰 보리의 오줌 같은 슬픔
나는 벽에 기대앉아
오줌 한 모금 먹고
종이 한 장 먹고
또 하루를 새까맣게 지운다
창밖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이틀 사흘이 가고
종이로 만든 길이
내 뱃속에 구절양장
빙빙 돌아간다
그 길을 내가 한없이
중얼거리며
까만 똥처럼 오그라져 지나간다
- 『우리들의 음화(陰畵)』,문학과지성사,1990.
* 책을 내면서 나무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책의 재료인 종이가 나무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책이 나무 한 그루의 가치를 가져도 본전은 되겠으나 혹 거기에 미치지 못할까 하는 겸손의 말로도 들린다. 지구의 폐 기능을 담당하는 나무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는 사람이나 목숨 값이 나무나 사람이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나무 한 그루의 가치를 시장 가격으로만 너무 헐하게 잡는다는 생각도 할 법하다. 그러니 한 권의 책이라도 나무에게 빚을 남기지 않도록 애를 써야 하는 게 인텔리의 양식이겠다.
여기서 염소와 인텔리의 차이도 떠올려볼 수 있다. 염소는 종이를 먹고 똥으로 싸는 데 그치지만, 인텔리는 종이를 먹고 글로, 책으로 싼다. 염소는 보리를 먹지만 인텔리는 보리와 보리술을 함께 즐긴다. 위 시의 화자는 염소와 인텔리의 시간 그 사이를 끙끙 앓는 중이다. 먹은 종이를 소화하여 참한 똥 하나 만들고 싶은 거다. 그런 글 한 편 내고 싶은 거다. 보리술에서 굳이 “오줌 같은 슬픔”을 이야기한 것도 그것이 글은 쓰기 위한 거름이자 착화탄이면서 동시에 배출을 기다리는 욕망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텔리의 어원을 찾으니, 러시아어 인텔리겐치아 (intelligentsia)에서 나온 말이다. 구체제에 대한 비판가이며 사회변혁을 담당했던 지식층이다. 지식(知識)에서 知자는 화살(矢)과 입(口)이 결합된 글자다. 화살이 과녁을 맞히듯 핵심을 말하는 것으로 새기기도 한다.
인텔리는 글을 쓰는 사람이요, 글을 쓰되 나무의 가치를 다하도록 애쓰는 사람이요, 잘못된 것에 대해 시위를 메기는 사람이다. 염소는 이런 고민을 안 하겠지만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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