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은밀 / 민왕기

톰소여와허크 2018. 6. 12. 20:57





은밀 / 민왕기

 

 

방 안에 엎드려 소리 없이 밤이 가고 있다

 

적막이 걱정으로 오는 봄밤에는

바늘 하나가 물을 건너는 소리까지 다 들린다

 

그럴 때면 나는 너무 멀리 와 살고 있다

 

그 먼 골목 수선집, 도망 온 사람들 숨어 베갯잇 시치는 바느질이 깊어만 간다

 

어느 하늘까지 바늘은 흘러가서 비밀이 되나

 

잔별들 스미는 밤이 너울거려서, 오늘은 바늘의 비밀을 은밀이라 불러본다

 

말 없는 바늘 하나의 봄밤이라면

누구에게든 내밀했던, 은밀 하나 있을 거니

알전구 아래 옷감을 누비듯 살짝 배를 보이는, 한 생애가 출렁이기도 하리라

 

바늘귀처럼 가늘어진 마음 저편에 그이가 앉아있고

보일락말락한 바늘의 은근이 노곤히도 풀어진다

 

그럴 때면 나는 너무 멀리 와 살고 있다

멀리 와서, 살고 있다

 

그 말 하나로 숨어서, 오늘은 나도 몰래 가느다란 은밀이 되어보는 것이다

 

-『아늑, 달아실, 2017.

 

 

* “적막이 걱정으로 오는 봄밤이란다. 이제껏 살면서 그런 적이 적다고만 할 수는 없겠다. 시인은 유다르게 바늘 하나가 물을 건너는 소리까지 듣는 귀를 가졌다. 그 소리는 어김없이 시간을 지워나가는 시곗바늘 소리일 수도 있고 수선집인 만큼 재봉 바늘의 박음질 소리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귀뚜라미 타전 소리 듣던 모 시인처럼 시인은 바늘의 타전 소리에 귀 기울일 뿐만 아니라 바늘의 행방까지 쫓는다.

이러한 동작들이 말 그대로 은근하고 은밀하여 야단스럽지 않다. 봄밤에 스미듯 정밀하고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시인이 묘사하는 낭만은 깊은 슬픔을 동반하고 있다. “누구에게든 내밀했던, 은밀 하나 있을 거라고 표현했듯이 시인 역시도 어떤 사연, 무슨 비밀인지 그것이 연유가 되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너무 멀리 와 살고 있다고 거듭 말한다.

너무라는 말 속에 돌아가기 어려운 시간적, 심리적 거리가 느껴진다. 이 거리는 슬픔이겠지만 동시에 숨을 수 있는 여유이기도 하다. 아마 이 지점에서 슬픔을 간직한 낭만혹은 낭만 속의 슬픔이 차례로 일어나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면서 그저 가느다란 은밀이 되고 마는 것일 테다.

함께 있어 좋았던 그런 쓸쓸한 아늑”(아늑에서)을 좇는 시인의 시집은 아늑’, ‘은밀뿐만 아니라 간절, 희미, 애틋 등 노곤히도풀어지는 이야기를 잘도 들려준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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