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 달린 자전거 바퀴 / 라윤영
발자국이 전신줄에 걸려있다
자기 맘대로 휘청거리는 비닐봉지
볕이 남긴 온기가 점점 차가워진다
눈이 바퀴를 달고 서쪽을 향한다
떠나가는 모든 삶은 아름답다
지나간 아버지와 술 취한 두 발 자전거
비틀거리다가 빛 속으로 숨는다
그림자가 되기 위해
아버지는 하얗게 지워지고 있다
- 『어떤 입술』, 애지, 2018.
* 전신줄에 걸린 발자국은 불안하다. 전신줄에 걸린 비닐봉지도 웅웅 울어대는 존재의 처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존재가 애초에 화자인가 싶다가도 어느새 아버지로 연결되어 있는 걸 본다.
이미 아버지는 세상 저편인 서쪽으로 주소지를 옮긴 상태다. 그 서쪽을 따르며 눈을 바퀴처럼 굴리는 게 타임머신을 작동시키는 동력이 되었을까. 문득, 전신줄에 자전거 바퀴가 구른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자전거는 구별되지 않고 함께 술 취하고 비틀거리며 간다. 동화 같기도 하고 착시 같기도 한 이 풍경은 오래가지 않는다. 마치 ‘지우개 달린 자전거 바퀴’처럼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지워지면서 아버지는 “그림자”가 되려고 한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지만 흔적이 있다. 흔적이 있어 기억을 더듬고 추억하게 한다. “떠나가는 모든 삶은 아름답다”고 얘기하는 건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에 비하면 분명 낭만적인 요소가 있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지나가기 때문이고, 그 흔적을 좋이 추억할 수 있어서다.
지나간 아버지의 자전거 바퀴를 보게 된 날은,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 든 시인이 아버지처럼 술에 취하고 비틀거리며 기꺼이 “그림자”가 되려는 마음으로 통하게 된 날이기도 할 거 같다.
바퀴는 어디든 굴러가겠지만 바쁜 현실이야말로 성능 좋은 지우개란 생각이 든다. 지우개는 그림자까지 지울 작정으로 바로 뒤에 따라붙고 있지 않나.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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