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 꽂힌 시집들 / 이환
나무의 후생이 빼곡히 진열된 곳
이곳에서도 그들은 꼿꼿하다
잘리고 벗겨지고 잘게 쪼개지면서
하나의 문명을 얻었고 야무진
손끝 하나 만나 마침내 들어선 곳
참 행복한 이곳의 나무들
직립의 허공을 살던 추운 몸들이 비로소
살 맞대고 오랜 향기로 남을 수 있으니
얼마나 오랜 울음들이 산에서 내려와
단단한 노래로 다시 태어날까
눈부신 아침
한 번 펼쳐보지 못하고 쫓기듯
빛의 사각지대로 거처를 옮겨 다니는 무수한
부랑의 파본들 저 높은
서가에 꽃힌 시집들은
바람의 굴욕을 받아낸
추운 혼들의 유서 그러므로
시 한 편 읽는 일은 어떤
불행한 생의 마지막을 듣는 것처럼
한없이 외로워지는 일
- 『세상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갖기 시작했다』, 시산맥사, 2018.
* 인류의 최고 발명품을 두고, 저마다 꼽는 게 다를 테지만 종이도 유력하게 거론된다. 인류 문화의 축적과 전승으로 이만한 삶을 누리는 데 종이가 절대적 역할을 한 걸로 보는 거다. 종이 보급은 문자나 인쇄 기술의 발달에 영향을 주고, 그 반대로 영향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종이에 쓰인 문자 중 시는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나름 읽어내고 그것을 짧고 함축적인 말로 담아낸다. 그 시가 모여 사는 곳이 시집이고, 시집이 떼로 모여 사는 곳이 서가다. 그 종이와 시집과 서가는 공히 “나무의 후생”이다. 나무는 땔감이나 자재로도 요긴하게 사용되겠지만 시집이 되는 보람에 비할 바는 아니다.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를 간직한 “오랜 향기”는 참으로 그윽하겠다.
시인이란 존재는 연필 잡은 “손끝 하나”로 “오랜 울음”을 받아 적고 “단단한 노래”로 틔워 부를 줄 알아야 한다. 나무의 바람도 그러할 것이고, 나무를 희생해가면서 시집을 내는 이의 꿈도 그러할 것이다.
사람이든 나무든 그 누구든 간에 진짜 향기는 시집을 펼쳐야 나는 법이다. 한번 보고 “빛의 사각지대”로만 전전하며 쓸모를 갖지 못하는 시집의 운명도 허다할 테니 이를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도 쓸쓸해진다. 시집 한권 한권이 “추운 혼들의 유서”임을 생각한다면 다른 이가 따끈히 품을 수 있도록 내주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웬만한 주인들은 어렵다고 할 것이다.
시집을 펼치지 못할 바엔 스스로 “추운 혼”이 되어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을 시 한 편을 남기는 게 상수 같긴 한데 이 또한 어렵고 어렵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돼지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 이민숙 (0) | 2018.09.19 |
---|---|
엉겅퀴꽃 / 방화선 (0) | 2018.09.11 |
지우개 달린 자전거 바퀴 / 라윤영 (0) | 2018.09.02 |
웃는 종이 / 문동만 (0) | 2018.08.28 |
술에 대한 단상 / 김완 (0) | 2018.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