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그 후 오랫동안 / 김리영

톰소여와허크 2018. 11. 1. 11:02


그 후 오랫동안 / 김리영

 

 

병산리 38번지, 배롱나무는

비에 절어 잠 못 든 밤에도

기둥 휘어진 만대루에 올라

대들보 아래 눕지 못하고

팔작기와에 가려 자란 질서

 

한참을 바라만 보고 살았겠지요

동재와 서재로 나뉜 유생들의 기거

뒷마당에 피멍울 흘린 나무의 역경을

허무는 것은 허드렛일이었을까요?

 

배롱나무는 꽃물 깊이 밝아

불 켠 정료대보다 눈부셨을 텐데

누각 넘어 푸른 절벽 비춘 핏자국

스스로 무섭기나 했겠습니까

삼백팔십 년 억눌린 울혈이

겹처마에 진창을 흘려 붓지요

 

모두 떠나가고 혼자 남아 게워낸다고

입추에 꽃잎 터져, 슬그머니 눈물도 흐른다고

위계(位階) 없는 문자 한 통 보내고 싶지만

보낼 곳 없는 배롱나무 그늘

 

-춤으로 쓴 편지, 북인, 2016.

 

 

* 병산서원은 누구에겐 병풍을 두른 산과 그 앞에 흐르는 낙동강으로, 또 누구에겐 주변 경치를 조망하며 한번쯤 눕기도 했을 만대루 널찍한 마루로 기억될 만하다. 또 다른 누군가는 류성룡의 발자취를 더듬고 병호시비(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의 위패 자리를 두고 풍산 류씨와 의성 김씨의 자존심 대결) 끝에 이곳에 모셔진 위패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할 것이다. 여름 한 철 무심코 병산서원에 닿았다면 서원 입구부터 뒤편 사당까지 여기저기 불 놓은 듯한 배롱나무 꽃을 한참 쳐다보게 될 거도 같다.

시인의 눈길을 끈 배롱나무는 삼백팔십 년 억눌린 울혈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강학 건물인 입교당과 사당인 존덕사 사이 노거수 여섯 그루일 것이다. 긴 세월을 견디고 어떤 경우든 한 시절 너끈히 꽃을 피우고 마는 배롱나무에서 시인은 아름다움과 기다림과 고통을 한눈에 보고 만 것일까. 배롱나무 붉은 꽃은 정료대에 지핀 그 어떤 불보다 환하고 눈부시지만 오랜 세월 붙박여 안간힘으로 꽃물을 끌어올린 흔적을 갖고 있을 것이다. 꽃물이 피멍울과 울혈로 인식되고 마는 것은 그렇게 꽃 피우기 위한 지난한 과정에 생각이 미쳤거나, 울컥울컥 토해내고 진창으로 구르고 마는 여정이 짐작되어서 이기도 할 것이다.

피는 일로, 지는 일로, 또 그 반복으로 배롱나무는 얼마만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걸까. 꽃을 피우는 일로 정점을 찍으면 이후론 말라가는 물기를 어쩌지 못하는 시절이 온다. 이는 배롱나무의 일이지만 사람의 일도 거기서 기기다. 꽃이 피고 지는 일이 인연이 생기고 없어지는 일을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모두 떠나가고 혼자 남아 게워내다가 눈물짓는 건 배롱나무의 일이기도 하고, 시인의 마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시를 읽는 이의 사연이 될 수도 있겠다.

시인은 배롱나무 그늘에서 위계도 차별도 거짓도 없는 사랑을 꿈꾸었을까. 석 달 열흘 붉은 꿈도 놓아야 할 때가 있으니 암만 그리워도 이전으로 똑같이 돌아갈 순 없다. “문자 한 통을 끝내 보내지 못한 사람들을 배롱나무 그늘이 품는다. 훗날, 병산서원 배롱나무 아래 서면, 미끈한 껍질 한 장에서 그때의 문자를 발견하고 서늘해지기도 할 것이다. (이동훈)

 

* 사진은 2010년 만대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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