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와 청소부 / 이령
- 눈 내리는 새벽에
난, 몽상의 미학자
어제, 걸어 둔 뱀피 무늬 잠옷에 불의 혀를 밀어 넣고
오늘, 마시다 만 포도주에 겨울의 심장을 블랜딩 한다
오늘의 골방이 내일의 우주가 되는 기적을 위한 축배, 雪
창이 열리면 들어오고
창이 닫히면 가뭇없는
지상의 모든 星座는 지붕을 뚫고 거실을 지나 나의 창을 두드리고
내밀한 것들은 겨울을 몰고 별처럼 반짝이네, 새벽을 밝히네
오늘은 없었고 어제는 있을 것인가
머리와 가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난 말의 회랑을 돌아 오늘을 닦고 있는 청소부
오늘, 남긴 단 한 줄도 타는 심장을 녹일 수 없고
어제, 포도주는 굳은 혀의 도수만큼 식을지라도
난 겨울의 공격 속에서 골방의 내밀함을 키워 가리라
순백의 비수를 기꺼이 맞으며
사위가 온통 환한 새벽을 걸어가리라
뜨겁거나 차갑게
미치거나 미쳐가고 있거나
나이거나 나였을 것이거나 마침내 우리가 되는 그 무엇을 위해
- 『시인하다』, 시산맥, 2018.
* 눈 내리는 새벽, 시인은 눈을 “순백의 비수”로 표현한다. 눈에 찔리어 가며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그 무엇”을 결실하려는 태도다. “그 무엇”은 “오늘의 골방이 내일의 우주가 되는” 대단한 일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일은 “기적”에 가깝단다. 그리고 그 과정의 언명도 다소 수수께끼 같다.
“오늘은 없었고 어제는 있을 것인가”란 시구가 그렇다. 먼저 ‘오늘은 없었다’라는 명제부터 낯설다. 몽상의 미학자답게 몽상은 있되 몽상 속에 있었으면 하는 현실이 없었다는 말로도 들린다. 다음으로, 내일이나 미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어제’를 둔 것도 상식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문장을 바로 지나지 않고 멈춰서 생각하게 해준다. 사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일 뿐이니 오늘의 부재가 지난 어느 시간인들 오롯하게 채워질 리 없다. 몽상이 몽상에 그치고 현실로 완성되지 않는 지점에서 “머리와 가슴의 경계”는 거듭 무너진다.
그럼, 부재의 시간을 견디면서, 머리와 가슴의 경계를 줄다리기 하며 오늘의 골방을 우주까지 확장시킬 “그 무엇”의 정체는 뭔가. 시인이 “말의 회랑을 돌아 오늘을 닦고 있는 청소부”로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낸 만큼 시인이 꿈꾸는 건 언어를 다루며 어제오늘의 시간과 고투하며 “단 한 줄”을 제대로 긷는 거다. “겨울의 공격”과도 같은 주변의 부당한 시선이나 편견에 굴하지 않고 자기를 표현하는 무기를 다듬고 가리라는 의지도 보인다.
오늘도 시인의 골방엔, 오지 않은 한 줄을 위해서 몽상가와 청소부가 수시로 만나고 헤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밤바다, 그 울음의 지척 / 김명리 (0) | 2018.11.22 |
---|---|
엄마 돼지 여섯 마리 / 박기영 (0) | 2018.11.17 |
자연 공부 시간 / 최춘해 (0) | 2018.11.07 |
그 후 오랫동안 / 김리영 (0) | 2018.11.01 |
I Can't Stop Loving You* / 정이랑 (0) | 2018.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