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헤밍웨이 집 / 정하해

톰소여와허크 2018. 11. 28. 20:35


헤밍웨이 집 / 정하해

 

아파트 로비 책장에서 오래된 당신을 만났다

어릴 적 만났던 활자 그대로인 표지

단숨에 책장 넘겼지만 페이지에서 떨어져 나온

누런 편지 한 장, 당신을 읽은 그녀가

애인에게 온 편지인 듯 정갈하게 접혀있어

무덤을 여는 것처럼 조심스레 읽었다

그녀와 애인의 편지를 읽는 내내 그들만의

깊은 연애를 엿보는 재미가 당신을 잊게 했다

그는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다는 말과

시골이지만 덥다고 낙향의 상태를 자세히 알렸다

좀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미에는

미술학도인 그녀의 첫 전시회가 성황이었는지

어땠는지 걱정스레 묻는 말로 애틋함을

대신한 듯 찬찬히 편지를 마무리해 나갔다

당신을 읽으려고 했다가, 청춘이 더부살이한

그들의 현장에 나는 22층까지의 많은 집들 중

누구 것인지 궁금하지만 알 턱이 없고

그때부터 지금껏 한 몸으로 천년지기 했는지

어땠는지, 편지를 다시 당신 품에 놓았다

이토록 남녀가 늙지 않고 당신과 동거를

하는 일이 흔치 않기에 잠시 당신을 닫았다

 

- 바닷가 오월, 서정시학, 2018.

 

* ‘Hidden Hemingway’를 준비하던 로버트 엘더는 고교 시절 헤밍웨이가 쓴 연애편지를 발견하고 공개한 바 있다. 언론에 소개된 첫 구절은 "비할 데 없는 너의 우아함과 오감을 만족시키는 사랑스러움, 아름다움이 나를 바보로 만들었어."이고 그 대상은 1년 후배 아네트다. 실제 두 사람은 연애 비스름한 것을 하다가 헤밍웨이가 이탈리아-오스트리아 전쟁에 자원했다가 부상당하고 간호사 쿠로프스키를 만나면서 둘은 헤어진다. 이후 헤밍웨이는 여러 여자와 만나고 헤어지면서 다수의 연애편지를 남긴 걸로 알려져 있다.

시는 헤밍웨이의 편지와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누군가가 내놓은 헤밍웨이 책 속의 편지가 발단이 된다. 헤밍웨이를 읽으려다가 남의 집 연애사를 대신 읽는 재미에 헤밍웨이는 뒷전이다. 다만, 연애를 오래 간직한 집으로 헤밍웨이 책은 의미를 부여받는다. 애초에는 헤밍웨이를 읽으려던 것이 연애 주인공에게 밀린 셈인데, 시인의 말마따나 이토록 남녀가 늙지 않고 당신과 동거를 / 하는 일이 흔치 않기에헤밍웨이의 양보를 구할 만하다.

일상의 에피소드를 시로 가져와서, 연애편지가 든 곳간을 헤밍웨이의 집으로 환치하는 순간, 시적 재미가 생긴다. 사실, 작가의 진짜 집은 작품이다. 우연히 만난 연애도 좋지만 작가의 집인 작품 속에 들어 숱한 연애의 기쁨과 질곡을 맛보는 일도 생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헤밍웨이의 집은 그간 노인과 바다정도를 지나오며 입구에서 돌아선 적이 많았는데 닫은 책을 다시 펼 마음이 살짝 생긴다. 헤밍웨이 집은 그렇다 치고 시의 집은 어디인가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

아마도, 그건…… 시집!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