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향산방 전경
–수화 김환기의 말 / 이동훈
양식을 빌지 못한 가장 대신
늙은 감나무가 베이고 말았소.
차라리 나를 패서 땔감으로 하지 그랬냐고
말끝에 바늘을 냈더니
굶어 죽든지 얼어 죽든지 하는 판에
생목숨이 나무목숨보다 헐하냐고
향안이 따져 묻는데 그저
나무에게든 누구에게든 미안한 마음뿐이오.
수화 소노인이라고
용준 형이 장난삼아 써준 이름이 내 실질이 되었소.
전쟁 통에 아예 노인이 되어버린 듯하오.
서운하게도, 용준 형의 감나무만은 더 늙지 못하겠구려.
애초에 늙은 감나무 좇아 이사 올 때
태준 형이 선물한 이름이 노시산방인걸 아오.
그런 감나무를 당신에게 물려받으며
수화 양반, 향안 각시 한집 되었다고 수향산방이라 했소.
늙은 감나무 보러 예까지 온 용준 형
명랑한 그림 한 점 장난해 준 걸 기억하오.
키 큰 수화 더 크게
키 작은 향안 더 작게
감나무의 감들은 저마다 배꼽 내서 웃게
저 아래 이태준네 아이들 얼굴처럼 개구지게…….
한데 다 지난 일이오.
피난 열차에서 부산항까지
마른 감꼭지 같은 사람들을 지나오면서도
그 위로 조선백자 같은 달이 뜰 걸로 믿었건만
이젠 슬픔 없이 그릴 수 없다오.
용준 형도 태준 형도
잡고 울,
늙은 감나무도 없으니.
* 김용준, <수향산방 전경>(1944) - 화가 김환기 부부가 김용준의 노시산방(老枾山房)을 인수해 수향산방(樹鄕山房)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제 집도 주인도 바뀌어 그림으로만 옛 자취를 더듬을 수 있다.
김용준, <수화 소노인 가부좌상>(1947)
김환기, <피난열차>(1951), <부산항>(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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