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길 끝 보리술집

톰소여와허크 2020. 4. 2. 00:56




길 끝 보리술집 / 이동훈


아주 이르거나 웬만큼 늦은 퇴근이면
한 번쯤 옆길로 새고 싶다.
지끈대는 길거리, 호객하는 밤거리 지나
이정표 없는 길로 무작정 걸어가고 싶은 거다.
길거나 짧은 골목을 빠져나와
묵정밭과 도랑물 사이를 걷다가 막다른 길
탁자 하나에 빈 의자만 얌전한
구석지고 막막한 술집에 닿고 싶은 거다.
고춧가루 듬뿍 친 번데기 안주에다
보리술 한 양동이 받아 두고
빈 의자에 어울릴 이름을 불러내고 싶다.
번데기가 불쌍하다며 훌쩍일 박용래
자기 술은 소주로 바꿔 달라는 김종삼
뒷자리 술값과 여비를 요구하는 천상병
나무젓가락으로 번데기 국물 찍어 낙서하다가
기침을 터뜨리고 마는 이상
그 기침까지 따라하는 박인환
김일성 만세할 자유를 중얼거리는 김수영
막다른 집에 몰려 저마다 시끌시끌하다가
들을 거 조금 듣고
흘릴 거 아주 흘려서 가벼워지고 싶은 거다.
길 끝 집이 좋았다고 이상이 인사라도 할 것 같으면
길에도 끝이 있냐며
번데기 앞에 주름잡듯 보리술 냄새피우고픈 거다.
출근길이 퇴근길인 일상에서 벗어나
아주 가끔은
옆길로 빠져 길을 잃었으면 할 때가 있다.
길 끝 보리술집에 앉아
만화책 찢어진 뒷장처럼 궁금해지는 이야길 좇아
오래 홀짝이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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