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풍경 / 정미숙

톰소여와허크 2019. 3. 10. 11:25

풍경 /정미숙

 

 

나의 고향은 전남 고흥 읍내

40년 전통을 자랑하는 소머리 국밥집

공생집은 초등학교 3학년 남자 짝궁집이다

유일하게 나에게 모든 걸 져주었던 공민식이네 집

그곳에서

소머리 국밥을 먹고

어물전 귀퉁이 돌아

45년 만에 어린 날 친구들을 만났다

생선가게는 혜숙이네 가게 건너

야채가게는 순옥이 엄마네 가게

다시 귀퉁이를 돌아가면

고흥극장 옛 건물 아래

나의 본적 628번지 그 옷가게

유년시절 나의 집이었다

 

봉황천이 흐르는 정자 옆

읍내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

800년 나이 먹은 느티나무 아래서

어린 날 나의 소꿉놀이 신랑 이수호

미술학원 하는 아내 홀로 두고서

잠자듯이 저세상 갔다는 이야기

늘 조용하기만 한 혜영이

자식 셋을 떼어두고서

비구니 되었다는 이야기

도란도란 실타래처럼

우리들의 인생

저리 흐르고 흐르는 봉황천처럼

흘러가겠지

 

등에 핀 꽃, 작가, 2018.

 

* 봉황은 민화의 소재이기도 한데 주로 오동나무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열매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고 하여 작은 이익에 휩쓸리지 않는 군자의 덕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 최고 권력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니, 봉황은 일반 서민의 삶과는 유리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비봉산 등 지역 곳곳에 봉황이 든 지명이 수두룩한 것은 고상한 군자든, 현실적인 실력자든 지역 인재들이 그렇게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다.

시인의 고향인 고흥엔 비봉산도 봉황산도 다 있고, 읍내를 흐르는 고흥천 일부를 봉황천이라고도 부르는 듯하다. 봉황 대신에 나로호가 뜨긴 했지만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이 활짝 펴는 일은 기대하기 어렵다. 소머리 국밥집 민식이네, 생선가게 혜숙이네, 야채가게 순옥이 엄마네의 삶에서 그들의 자식들이 도회로 서울로 나가면서 삶의 방편을 얻는 나름의 역사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들의 삶은 대개 고단했을 것이다. 지역에 남은 친구들의 삶도, 풍문에 들리는 동창들의 소식도 고만고만한 삶의 아픔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삶을 밀도 있게 풀면, 형제슈퍼 등이 생계를 위해 다른 가게와 각축하는 원미동 사람들같은 작품이 쓰일 수도 있겠지만 한 편의 시로 담기엔 무리가 있다. 시인은 장면 장면을 짧은 소묘로 기록해두려 한다. 풍경은 남의 것이 아니다. 시인 자신이 지나온 삶의 모습이 풍경에 겹쳐 있기 때문이다. 대상과 자신을 구별하지 않고 봉황천으로 함께 흘러갈 것이라는 대목에서 고단한 삶들에 대한 연대의식도 엿볼 수 있다.

아직까지 역사는 봉황을 자처하거나 그렇게 평가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강 하류를 흐르는 한 명 한 명의 삶 또한 역사다. 이 역사를 남이 기록해주면 좋겠지만 자기 자신이 자기 삶과 노동과 세계관을 이야기하고 기록해둠으로써 역사의 한 장에 참여하는 방법이 훨씬 진실하고 풍성할 것이다. 시인의 시편에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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