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책의 장례식 / 성윤석

톰소여와허크 2019. 3. 3. 21:51

책의 장례식 / 성윤석

바다로 가기 위해 가진 모든 책을 버렸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수천의 문장을
버리는데 육조 혜능이 게송을 들려주고 굴원이
리어카를 밀어주었네
나 두 대의 오토바이를 양쪽에 세운 뒤 네트를 만들고 하는
냉장 창고 서기들의 족구 시합에 참석하기도 했네 킬킬거리며
멘델레예프가 적당한 도수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다는 
보드카에 취해 밤새 서기들이 추는 오징어 춤 해파리 춤을
구경하였다네
새벽이 되자, 서기들은 다시 생선들을 기록하고
나는 버린 1.5톤의 책들 속 멸치 떼처럼 튀어 오르던
명징한 문장들을 지우려 애썼다네
나 이 바다로 오기 위하여 책을 버렸네
더 이상 숨을 수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수천의 시들을 버리는데
휠덜린이 요양 병원 창가에서 내다보고
김소월이 자신의 시 「비단안개」에 누가 곡을 
붙였다며, 불법 테이프를 건네주었네
나 책 한 권 가진 게 이제 없다네 이 장례식엔
아무도 조문 오지 않고 킬킬 빨간딱지를 가지고 온
집달리만 도대체 책들을 어디다 버렸냐고 
고함을 지르고 있다네

- 『멍게』, 문학과지성사, 2014.


* 읽어온 지난 책의 영향을 슬쩍 내비치며 그 책의 장례를 치르고 막다른 공간, 바다로 오게 되었다는 시 내용이다. 서술에 드러난 지적 유희와, 유희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절박한 생계 문제가 묘하게 얽혀 흥미를 준다. 
“바다”로 가기 위해 “책”을 버리는 ‘나’를 시인으로 단정할 순 없지만 시인의 많은 부분이 투영되었을 줄 안다. 버린 책 중엔 혜능과 굴원도 있다. 혜능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스승의 자리를 꿰찬 인물이고 굴원은 세상이 탁하고 취했는데 저 혼자 맑아서 힘들었던 인물이다. 먹고 사는 일에 떠밀려 책을 버리는 순간, 혜능과 굴원이 어떤 위로가 되었을지 그래서 짐짓 여유가 생기기도 했을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의 문체엔 여유가 있다. 
시인이 “바다”를 애초부터 지향해 온 것은 아니다. 바다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 이고 동시에 “더 이상 숨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책들이 사는 방편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책을 버린들 삶의 길이 갑작스레 열리는 것은 더욱 아니다. 
휠덜린이나 김소월은 생활을 떠나 이곳에 먼저 와 있는 이웃이다. 이들은 한때 안간힘으로 현실에 적응하려 했으나 결국 부적응자가 되어 요양병원에서 여생을 마치거나 약을 찾아야 했던 인물이다. 생계에 쫓긴 시인 역시 이들과 동류가 되어 그들의 이름을 기꺼이 불러주지만 정작 자신은 더 이상 심각해지지 않는 눈치다. 
관조도 농담도 배려도 여유가 있어야 나온다. 시인의 글에서 느낀 유머와 여유도 시인이 이전에 읽었던 책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책의 장례를 치르더라도 이미 몸속에 든 것은 휘발되지 않을 것이니.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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