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에세이>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톰소여와허크 2019. 5. 7. 17:53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난다, 2017.

 

 

- 박준 시인의 시적인 산문이다. 화전(花田)이란 곳으로 이사해서 낡은 한옥에 살 때 시인은 그 사랑채에서 번번이 꿈을 꾼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하던 시절이다. “꿈속에서 나는 등단한 시인이 되었고 액션 영화의 배우가 되기도 했으며 한번 먹어본 적 없는 민어회를 된장에 찍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액션 배우 말고는 꿈을 실제로 이루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꿈방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밥을 먹고, 시를 쓰고 시를 읽어주는 삶을 꿈꾼다.

문학지의 편집 실무자였던 시인이 문학지 주간이었던 김선생님과의 인연을 떠올리는 부분도 소소하니 정겹다. 마흔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고갤 돌리며 술잔 비우는 걸 선생은 불편해 한다. 소주 한 병씩 마시고 일어나자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선생은 본인의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다 싶으면 그만 말을 맺으시고는 내게 이것저것 물어오셨다자신이 말을 하는 시간과 상대방의 말을 듣는 시간이 사이좋게 얽힐 때 좋은 대화가 탄생하는 것이라 나는 그때 김선생님을 통해 배웠다고 말한다. 작고하신 소설가 김선생이 누구인지 궁금하지만 주변에 많은 분들이 이미 그런 분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관계가 마냥 좋을 리 없다. 불편한 관계와 복잡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시인은 휴대전화를 끄고 낯선 도시에 가서 숙소를 잡고 며칠이고 머문다. 여행보다는 도피라 불러야 좋을 것이다라고 하면서도 함부로 대했던 지난 시간 같은 것에 기웃거린다며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평생 노동을 업으로 했던 아버지와의 관계도 눈길을 끈다. 아들의 고3 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두고 아버지는 시험을 치르지 말았으면 하는 속내를 비친다. 아연하고 실색할 만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시인은 그런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하는 마음을 낸다. 시인의 아버지는 어릴 적 값비싼 세발자전거를 탄 적이 있다고 하지만 그건 일찍 세상을 떠난 엄마를 대신할 물건으로 할아버지가 선물한 것이라는 말끝에,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라고 적는다. 화전이든 꿈방이든 또 다른 어디든 시인이 쓰는 시엔 울어서 힘이 되는 뭔가가 있을 듯하다.

이전에 읽었던 시인의 시 한 편을 꺼내본다.

 

 

옷보다 못이 많았다 / 박준

 

 

그해 윤달에도 새 옷 한 벌 해 입지 않았다 주말에는 파주까지 가서 이삿짐을 날랐다 한 동네 안에서 집을 옮기는 사람들의 방에는 옷보다 못이 많았다 처음 집에서는 선풍기를 고쳐주었고 두 번째 집에서는 양장으로 된 책을 한 권 훔쳤다 농을 옮기다 발을 다쳐 약국에 다녀왔다 음력 윤삼월이나 윤사월이면 셋방의 셈범이 양력인 것이 새삼 다행스러웠지만 비가 쏟고 오방(五方)이 다 캄캄해지고 신들이 떠난 봄밤이 흔들렸다 저녁에 밥을 한 주걱 더 먹은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새벽이 지나도록 지지 않았다 가슴에 얹혀 있는 일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감상- “옷보다 못이 많았다는 한 구절로 고단한 삶의 단면을 환기시키는 힘이 느껴지는 시다. 이사를 나가거나 들어갈 때 그럴듯한 가구 하나 없는 가난일수록 낡은 벽지 아니면 시멘트가 드러난 맨벽에 못은 왜 그리 수두룩이 박혀 있는지…….

가난한 이웃의 이삿짐을 날라다 주는 화자 역시, 윤달이라서 돈을 굳힌 걸 안도하며 셋방의 월세를 걱정하는 처지다. 시인은 특별히 꾸미지 않으면서 한두 장면으로 가난을 드러낼 줄 안다. 시인 혹은 화자를 둘러싼 세계는 비가 쏟고 오방이 다 캄캄해지고 신들이 떠난 봄밤에서 보듯 절망적이다. 화자는 이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다. 또한 가슴에 얹혀 있는 일들로 인해 괴로운 생각이 얼마간 이어지기도 할 것이다.

걱정이 많으면 야위고 생각이 많으면 가난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가난해야 비로소 존재의 실존을 각성하게 된다. 쓰임도 없이 튀어나온 못처럼 화자의 존재는 쓸쓸해 보이지만, 고개를 돌리면 크고 작은 못들이 저마다의 고독과 궁상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못의 보이지 않는 절반은 어딘가 깊이 박혀 있을 것임을 생각한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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