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봉준호 감독, 2019)
영화를 보며 불편한 감정을 말하는 이는 두 가지 장면을 우선 꼽는 듯하다.
첫 번째는 가난한 기택의 아들인 기우(최우식)가 가사 도우미를 해하려 한 장면이다. 필연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가난하면서도 선량한 사람들을 욕보이는 거라는 의견이 있다. 을과 을끼리 자기 얼굴에 침 뱉는 행위로 여겨져 보는 게 힘들다고도 했다. 과장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예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면 오히려 덜 불편했을 것이다. 딴 세상 남의 이야기엔 좀처럼 심각해지지 않는 법이니까. 그러니 불편을 호소하는 이면엔 영화 내용이 현실과 강하게 결부되어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 있는 거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는 바람직한 현실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고도 한다. 거꾸로 불편하거나 속상할 만한 장면을 강하게 투사시킴으로써 그렇지 않은 현실을 꿈꾸게 하는 면도 있다. 문제의 현실을 파고들어 긍정이든 부정이든 사고의 진자가 크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건 이 영화의 미덕이다.
영화 속 기우의 극단적 선택과 행위는 상식적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내면 감정의 파고가 그를 잠식한 결과다. 나쁜 상황으로 말려들어가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면서도 거기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겠다는 모순된 양가감정이 작용한 걸로 보인다. 무엇보다 기우의 인생관에 혐의를 두는 게 좋겠다. 기우는 자신이 가르치는 부잣집 딸과 어울릴 만한 배경을 꿈꾼다. 삼수, 사수를 해서라도 일류가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실현 가능성은 둘째 치고 그런 욕망이 그를 살게 한다. 그 욕망이 봉쇄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또 다른 출구를 찾기엔 그는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었고 끝내 비싼 대가를 치르고 만다. 기우의 의식과 행동 뒤엔 그런 생각을 길러준 사회 분위기가 있다. 진짜 무서운 것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 이유다.
두 번째는 기택(송강호)이 자신의 가족에게 고정적인 수입을 제공한 부자 동익(이선균)을 공격하는 장면이다. 그 이유도 애매하고 빚어지는 행동은 더 마뜩잖다는 의견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동익은 가족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다정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남에게도 싫은 소리를 자제하는 점잖은 이미지도 보여준다. 겉으로는 그렇다.
좀 삐딱하게 보자면, 동익은 싫은 것을 자기도 모르게(?) 내색하고, 그로 인해 상대가 받게 되는 상처나 모멸감에 대해선 생각이 미치지 않는 인물이다. 그의 무의식의 저변에는 자신과 같은 부류(동류라 해도 좋겠고 같은 계급이라고 말을 붙여도 좋겠다)가 아닌 이상,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지하실의 가난 냄새가 몸에 밴 기택은 고용된 사람이지 결코 동류로 받아들일 수 없다. 매사에 건성으로 응하고 필요에 따라 기택을 의식적으로 대우할 뿐이며, 기택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즉각 반응하며 자신의 몸과 뇌가 거부감을 일으키는 걸 감추지 못한다.
동익에게 기택은 연민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전혀 섞이고 싶지 않은 부류다. 동익의 아내도 자기 발 냄새엔 개의치 않으면서도 기택의 냄새엔 얼굴을 찡그린다. 기택의 감정을 읽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중에 없다는 식이다. 기택은 가난 속에서도 가장의 책무를 놓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그런 그에게 코를 막고 찌푸린 얼굴을 하는 건 기택의 존재와 삶과 노동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행위다. 기택은 자신과 가족 또 자신과 가족의 애써 이룬 삶이 부당하게 대우받을 이유가 없다고 온몸으로 항변한다. 돈 말고는 자기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말이다. 동익은 죽을 만큼의 죄를 짓지 않았다고 억울해 하겠지만, 기택을 이해할 때 즈음이면 냄새를 가려 계급을 나누고 동류를 품을 기회를 스스로 버린 것에 대해서 회한의 감정을 가질 법도 하다.
기택 가족을 두고 부자를 이용하고 빌붙어 사는 기생충 같은 삶이라고 누가 인지했다면 이 또한 억울한 독법일 가능성이 크다. 기생충은 사람과 노동을 차별하는 모든 의식과 무의식 속에 무럭무럭 자라난다는 게 영화 내용에 충실한 이해일 것이다. 나누어 가지는 게 상식이면 기생이란 말도 사어가 될 텐데 말이다.
기택에게 법정 책임 대신에 지하실 비밀 공간을 허락한 것은 어둠과 죽음으로 몰아치는 파국에서 비켜나서 낭만적 해결을 시도한 것이다. 지하실에서 보낸 지하 생활자의 신호는 지금도 타전되고 있을지 모른다. 신호를 받아 적는 데 필요한 것은 종이와 여유다. 그런 다음, 짜빠구리 한 젓가락씩 평등하게 나누며 신호에 대해서 고민하면 좋으련만. 자본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자기 안의 분투만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남을 들여다보는 일이 점점 난망해질 것이니 숙주가 따로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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