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낮 열두 시 반쯤의 행방 / 정병근

톰소여와허크 2019. 10. 27. 00:38




낮 열두 시 반쯤의 행방 / 정병근

 

 

좁은 백반 집 4인용 식탁에

소주 한 병과 라면 한 사발 놓고

한 남자 달랑 앉아 있다

달랑 앉은 남자 얼굴 검다

허름한 작업복에 반목 작업화 신었다

반목 작업화 발보다 더 커서

바짝 졸라맨 발등 움푹 팼다

소주 한 모금 들이켜고 라면 한 젓가락 당기고

국물 한 모금 훌떡 불어 넣은 남자

빈 목젖 삼키며 뜸 들인다

뜸 들이면서 왕왕거리는 텔레비전 쳐다본다

곧 자리 난다는 아주머니 목소리 들린다

유니폼 입은 여자 셋 들어왔다가

다음에 올게요 하고 쪼르르 나가 버린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텔레비전이니까

어차피 저 혼자 떠드는 텔레비전이니까

소주 한 모금 들이켜고 라면 한 젓가락 당긴

남자 눈도 돌리지 않고 텔레비전만 쳐다본다

빈 목젖 삼키면서 텔레비전만 쳐다보면서

옆자리 나를 다 보고 있다

 

-『태양의 족보, 세계사, 2010.

 

 

감상- 어느 날이었을까. 낮 열두 시 반쯤의 두 사내 행방이 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두 사내는 좁은 백반 집에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다. 한 사내는 허름한 작업복에 발에 맞지 않는, 넝마주이에게 거저 얻었을 듯한 작업화를 신고 있다. 작업화를 바짝 졸라맨 것으로 보아 인근 공사장 막일꾼일 가능성이 높지만 텔레비전만 쳐다보며 식당 주인의 압박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뜨내기 노숙자일 수도 있다.

실제 이런 장면이 낯설지 않지만, 이 시의 낯선 점은 그날 백반 집의 또 다른 사내의 행방이다. 맞은편 사내의 작업화 끈 상태까지 관찰하는 눈을 가진 이 사내는 시인 자신이다. 시인의 행색을 미루어 짐작하긴 어렵지만 이 시의 재미는 시인이 사내와 구별되는 위치의 관찰자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거의 동류인 듯한 느낌을 주는 데 있다. 4인용 식탁에 달랑 혼자 앉아 소주 한 모금 들이켜고 라면 한 젓가락 당기며, 유니폼 입은 여자를 떠나게 해서 주인의 눈살도 받다가 텔레비전만 보는 사내는 식탁 저쪽의 사정만이 아니라 이쪽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거다. “옆자리 나를 마지막에 등장시킨 묘미로 시적 긴장을 놓지 않으면서도 한 시절의 풍경을 실감나게 스케치해 두었다는 생각이다.

혼자 밥 먹을 일이 종종 있다. 식당을 찾았다가 1인 식사 금지라는 종이를 붙인 걸 보고 돌아설 때도 없지 않다. 식당 입장에서는 당장 한 사람의 불편을 산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백반 집 사내처럼 옆자리 또 그 옆자리에서 다 보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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