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구슬은 썩지 않는다 / 이정연
충남 아산시 배방면 뒷터골
일제 시기 파헤친 폐금광이 있던 자리
여기다
광산 입구까지 짚단을 져 날랐던 청년
노인이 되고서야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여기다
전쟁통 피난길에 도민증이 없어
산속에 숨어지내던 열네 살 소년
육십칠 년 만에 입을 열어 가리킨 곳
엉덩이뼈 척추뼈 갈비뼈를 수습하고
대나무칼로 한 시간쯤 파내자
모습을 드러내는 머리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고꾸라진 죽음의 순간을 포착하고
죽음의 원인이었던 탄피들
유해와 함께 나오며 말하고 있다
나를 밀어낸 총구는
카빈 소총 M1 소총이에요
그러니까 나를 밀어낸 총은
인민군의 총이 아니에요
불에 그을린 검은 유해들
목숨이 채 끊기지 않은 이의 신음을
불로 다시 껐음을 시각적으로 증언하고
두개골에 붙어 있다 붓질 한 번에도
툭툭 떨어지는 이빨들
아직 누래지지도 못한 하얀 색으로
앳된 나이를 짐작케 한다
스무 개도 넘게 나온 옥비녀 은비녀 쌍가락지
파면 또 나오고 파면 또 나오는데
어린아이 정강이뼈 아래서 발견된
유리구슬 하나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육십칠 년 동안 무얼 지켜보고 있었나
증언과 증거가 일치한다
다음 순서는 무엇인가
-『유리구슬은 썩지 않는다』, 한티재, 2019
감상- 나치나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은 비판하면서 왜, 우리가 저지른 일에 대해선 말을 제대로 못하는지 시인은 묻는다. “먼 곳의 학살만 기억하고 / 남이 저지른 만행만 기억하는”(「우리가 만든 세상」 중) 모습을 보면서, 경산 코발트 민간인 학살 현장에 이어 아산시 배방면 민간인 학살을 조명하는 시편을 썼다.
한국전쟁은 군인보다 민간인 희생자 수가 훨씬 많았다. 시인의 주문대로 민간인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몇몇 사례만 뒤적여본다. 1950년 7월 대전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밀린 미군은 새로 구축한 방어선 이하로 내려오는 민간인은 사살해도 좋다는 명을 내린다. 난리를 피해 피난 가던 사람들을 비행기에서 난사하고, 쌍굴로 몸을 숨긴 사람들을 기관총을 세워놓고 무차별 사격해서 300여 명의 무고한 양민을 죽인 게 노근리 사건이다.
비슷한 시기 두어 달에 걸쳐, 보도연맹 가입자(좌익 활동 후 전향자뿐만 아니라 지역할당제로 인해 이념과 무관한 사람들이 다수 가입함)들과 대구형무소 재소자(미결수 포함)를 잠정적인 적으로 규정하고 코발트 광산으로 옮겨와 사살하거나 손발을 묶고 수직갱에 떨어뜨려 3000명 이상의 민간인을 사지로 민 게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이다.
또 다른 사례는 시에 인용된 것처럼,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인민군 부역자란 이유로 부녀자와 아이를 가리지 않고 300여 명 사살한 아산 배방면 학살 사건이다. 피난 가다가 죽어야 하고, 보도연맹 가입 권장에 응했다가 죽어야 했고, 총 든 사람이 시키는 일을 했거나 밥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죽어야 했다. 물론, 북쪽의 민간인 처지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니 전쟁을 치르는 동안 한반도 구석구석이 억울한 혼들의 울음으로 가득 찼다고 해야겠다.
그럼에도 반공을 국시로 한 이념사회에서 억울함을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진상 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이 어려웠다. 유족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건 빨갱이란 주홍글씨를 스스로 쓰는 일이었을 테니, 원한도 진실도 오래 묻혀 있었다. 이제, 노근리에 평화공원이 서고, 코발트 광산에 위령탑이 생기고 사회의 공기도 많이 바뀌었다. 머잖아 침묵 속에 있었던 제 2, 제 3의 배방면 학살 현장이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
시인은 독일인이 아우슈비츠 현장을 보존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며 악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과오를 더 알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서로의 생각이 암만 달라도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면 끔찍하고 참혹한 일만은 면할 수 있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비녀와 가락지의 주인은 어머니고, 유리구슬의 주인은 “앳된 나이”의 아들딸이다. 총을 들지 않은 자에게 총을 겨눈 야만을 참회해야 한다.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볼 생명에게 진정으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하기 전까진 땅속의 누구도 끝내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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