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푸른 잎새 사이로 태양은 지고 / 오민석

톰소여와허크 2019. 12. 21. 12:00





푸른 잎새 사이로 태양은 지고 / 오민석

 

 

미장이 아버지가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리는 동안, 나는 골방에 쑤셔 박혀 헤겔을 읽거나 화창한 봄날이면 김수영과 함께 고궁(古宮)을 나왔다. 김종삼의 시인학교(詩人學校)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술 취해 쓰러져 있는 어떤 시인의 뺨을 때리며 소설가 천 아무개는 시인들이여 항상 깨어있으라고 외쳤다. 시인들은 침을 뱉지 않았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읽다가 밤 이슥히 멀리 삼남(三南)에 눈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여름의 끝이 와도 아버지는 새벽에 일을 나가셨다. 뒹구는 돌이 언제 잠 깨는지 아무도 몰랐다. 다만 새벽이 왔고 마음 약한 베드로처럼 나는 자꾸 부인했다. 서양경제사를 공부했지만 나는 경제를 몰랐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처럼 나는 서가(書架)에 꽂혀 있었다. 어느 날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서가에서 쫓겨났다. 대신 작은 경제와 작은 정치가 나를 적셨다. 포플러 푸른 잎새 사이로 해는 졌고 나는 점점 사라졌다. 시인학교에는 죽은 시인들이 둥둥 떠다녔고 시인 김관식이 주정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엘리엇이 황무지(荒蕪地)에서 꺼이꺼이 울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 기차는 정확히 7시에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이 가고 갈 뿐이었다. 그리고 아주 가까이서 작은 경제와 작은 정치가 내 뼈를 말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굿모닝, 에브리원, 천년의시작, 2019.

 

 

감상 : 그 사람이 어떤 책을 지나왔느냐가 현재 그 사람을 말해주는 부분이 적잖다. 오민석 시인은 이전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그리운 명륜여인숙에서 “30촉 흐린 별빛 아래에서 우린 무엇이 되어도 좋았네 /루카치와 헤겔과 김종삼이 나란히 잠든 명륜여인숙을 떠올린 바 있다. 루카치와 헤겔은 나를 피해갔지만 다행히 김종삼의 시인학교는 나 역시 주위를 맴돌면서 기웃거린 학교이니 괜히 반갑다.

서두의 일곱 식구를 부양하는 미장이 아버지는 시인의 아버지일 수도 있지만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조세희)의 난쟁이 아버지일 수도 있고,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양귀자)에 나오는 임 씨 아버지일 수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상당수의 사람들은 가족 건사하느라 고단한 생을 지나온 일용직 노동자의 아들들이다. 언급된 작품 중에 알만한 것을 이어 보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시여, 침을 뱉어라(김수영), 삼남에 내리는 눈(황동규), 그 여름의 끝,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이성복), 황무지(엘리엇), 기차는 8시에 떠나네(테오도라키스), 기차는 7시에 떠나네(신경숙) 등이다.

각기 개성적인 목소리를 가진 이들을 이을 수완이 있을까 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불화하며, 그로 인한 고뇌와 방랑 혹은 후회와 추스름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개기는 인생도 괜찮다는 산문을 낸 시인도 위 작가들과 결을 같이한다. 제자들과 뒷골목 주점에서 인생을 세우고 술병을 넘어뜨리던 시인인 만큼 그가 시인학교를 불러낸 것이 술과 무관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시인학교 안에서 전봉래와 소주를 나누는 김종삼 시인 본인은 물론 김종삼 시인이 호명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술을 웬만큼 한다는 사실도 눈에 띈다.

그렇다고 이 시에 취기가 잔득 묻어 있다는 건 아니다(조금은 묻어 있다). 시인은 서가의 책과 그림과 낭만을 떠나 작은 경제와 작은 정치에 몸을 적신다. “작다는 표현을 썼지만 경제는 생계와 활동의 밑천이며, 정치는 개인 의사를 표현하고 동지를 만들고 몸담고 있는 세상 모습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것 아닌가. 그러니 경제와 정치가 개인에게 자유를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절대적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그 점이 또한 문제가 된다. 개개인이 자기도 모르게 경제와 정치에 종속되어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억압당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기 십상인 것이다. 시인이 굳은 작은이란 말을 붙인 이유를 생가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모험, 평등, 자유할 자유…….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는데, ‘작은것에 볼모가 되어 뼈를 말리면서까지 연연해하고 있지 않은지, 그렇다고 경제와 정치를 낮잡아 보다가 된통 엉망만 되는 건 아닌지 의문은 많고 답은 궁하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라고 하더라도, 크고 작은 것을 거꾸로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면서 삶을 복기하고 환기해보는 건 언제든 유용해 보인다. 시인이 그러했듯이 뒷골목 주점에서 시끌시끌 따지다 보면 삶의 요긴한 힌트 하나 얻어가기도 할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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