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예찬 / 김관식
귀를 씻고 세상 일 듣지를 말자.
피에 젖은 아우성
저마다 가쁜 호흡을 지키기 위해
사나이는 모름지기 곡괭일 들고
여자여, 너는…….
세리(稅吏)도 배고파 오지 않는 곳,
낮거미 집을 짓는 바람벽에는
썩은 새끼에 시래기 두어 타래……
가난! 가난! 가난 아니면
고생! 고생! 고생이랬다.
단정학은 야위어 천 년을 사네,
성인에게 가는 길은 과욕(寡慾)의 길.
밭고랑에서 제 땀방울을 거둬들이는
지나(支那)의 꾸리(苦力)와 같이
세월을 목에 감고 견디어 보자.
가만히 내 화상을 들여다본즉
이렇게― 언구렁창에 내던져 마땅하리라.
눈으로 눈이 들어가니
<눈물입니까.> <눈물입니까.>
요지경 같은 세상을 떠나
오늘도 나는, 누더기 한 벌에 바리때 하나.
눈포래 윙윙 기승부리고
사람 자국이 놓인 적 없이
흰곰만 아프게 소리쳐 우는 저,
천산북로(天山北路)를 넘는다.
-『다시 광야에』, 창비, 1976. / 동아일보, 1968.
감상- 김관식은 강경상업고등학교 선배인 박용래와 함께 시인으로 뿐만 아니라 기인으로 꼽힌다. 두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는 날보다 마시는 날이 많았다. 1954년, 김관식은 음독 소동 끝에 연상의 여인을 맞이해서 서정주의 동서가 된다. 1960년 4.19혁명 이후, 26세의 김관식은 신문사 일을 그만두고 국회의원 후보로 용산에 출마해, 예상대로 6명 중에 5위로 탈락한다. 이 과정에 고향의 논밭과 과수원을 처분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이후 홍은동 꼭대기 국유지에 무허가 판잣집을 십여 채 짓고 예술촌을 만들려고 했다. 실제 신경림, 조태일 등이 잠시 거주하긴 했으나 오래 머물 곳이 못 되었다.
이들의 주거지는 “세리(稅吏)도 배고파 오지 않는 곳”이라고 진담 반 농담 반 적었으나 실제 구청 공무원과 철거반이 수시로 들이닥쳐 무허가 건물을 없애면 새로 짓기를 반복했다. 김관식의 오기와 배짱은 살 만하나 식구가 인내해야 할 고통이 적잖았을 것이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곳은 책이라도 볼라치면 바람벽으로 “독수리 날개 같은 바람이 와서/ 초롱을 차고 달아나는”(「초야의 기도」) 곳이다. 김관식은 이 초롱이 저승으로 자리를 옮겨서라도 머리맡을 비쳐 줄 거라는 희망 아닌 희망을 갖는다. 이런 불안한 마음은 “병명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누운”(「병상록」) 상황과 관련된다. 지나친 술로 생긴 병이다. 겉으로 보기엔, 가난과 고생을 일부러 사서 요절을 재촉한 면도 있지만 시로 읽는 시인의 내면은 섬세하고 간곡하다.
의식적으론 배부른 것을 경계하며, 가난한 가운데서도 욕심을 줄여야 할 것을 지향하지만 당장의 생계는 시인으로 하여금 막노동에 나서게끔 해서, 일한 만큼의 대가를 기다리거나 견디는 쪽으로 내몰고 있다. 그 견디는 일도 더는 희망적이지 않을 때 바깥에 내리는 눈은 시인의 눈을 찔러 눈물을 내고 만다. 시인은 생계의 현장으로 가는 대신에 사람 자국 없는, 흰곰 우는, 험한 “천산북로를 넘는다”며 끝을 예감하고 있다.
김관식 시인은 현실을 바꾸지 못했지만 참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가난을 이기진 못했지만 진 것도 아니다.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병상록」)이라는 말이 그의 유언시가 돼버렸다. 가난 예찬은 아니더라도 마음을 파고드는 아름다운 시구다. 그럼에도 눈보라 속을 지나는 가난한 사내의 뒷모습은 쓸쓸하기만 하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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