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매화초옥도 / 우남정

톰소여와허크 2020. 5. 17. 00:10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 / 우남정

 

 

새벽이 매화를 보러 가는 길이다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가는 길이다

 

백만 그루의 매화나무마다 백만 꽃숭어리 터지는 길이다

 

아낙의 갈퀴손에 매화 향 진동하는 길이다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에 매실장아찌를 얹은 길이다

 

매화마을 둔덕마다 매실청이 익어가는 길이다

 

봄의 뜻이 다시 오는 길이다

 

* 매화초옥도 : 초옥을 찾아가는 자신을 표현한 전기(田琦, 1825-1854)의 그림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문학의전당, 2020.

 

 

감상 고람 전기는 약방을 운영하는 중인 출신으로 나이 스물에 시서화에 두루 능해서 이름을 낸다. 당대 최고 인문학자인 김정희로부터 인정받은 데다, 같은 중인 출신으로 매화 그림에 능했던 조희룡으로부터 전기는 스승을 두지 않고도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듣는다.

전기의 <매화초옥도>를 보고 있으면, 조희룡의 말처럼 그림으로써 시를 쓴 거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림 속 초옥의 주인은 오경석이고 거문고를 들고 다리를 건너가는 이는 전기 본인이다. 오경석은 김정희로부터 세한도를 받은 역관 이상적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상적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경석도 역관으로서 청나라를 수십 차례 드나들며 서적과 그림을 모았다. 진귀한 그림이 있으면 전기에게 보여주고 평 듣기를 즐겼으며 둘의 교류는 전기가 서른 나이로 요절하게 됨으로써 끝이 나고, 오경석은 이를 몹시 서운해한다. 오경석의 아들이 오세창이고, 오세창의 우리문화에 대한 사랑과 감식안은 간송 전형필에게 이어진다.

위의 시에서 우남정 시인은 <매화초옥도>를 보며, 매화에 이르는 여러 갈래 길을 상상한다. 그 길들은 그림에서 시로, 시에서 그림으로 오가는 상념 속에 생기는 것들이다. 특히, 섬진강 따라 탐매에 나섰던 지난 경험이 크게 작용하는 듯하지만 백만 꽃숭어리 터지는그 절정을 그림에서도 현실에서도 느꼈다면 우연한 일치라기보다는 이 또한 시인의 남다른 감식안의 결과일 것이다.

전기가 찾아간 오경석의 집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시인은 구례 지나 하동 지나 광양의 매화마을까지 찾아갔을 걸로 보인다. 단지 매화 향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매화 향이 아낙의 갈퀴손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시심은 더 그윽해진다. 평생 노동을 해온 손이 봄을 만나 더 바빠질 것이고 그 손이 닿은 곳은 거름지게 되고, 그 양분으로 나무도 사람도 자라는 것이다.

다시 <매화초옥도>를 본다. 찾는 사람과 반기는 사람 사이 정()이 흐른다. 고매(古梅)의 그윽한 향도 천지에 가득 찬다. , 먹과 붓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매화 줄기는 트거나 부석거리며 고생한 흔적을 남기는 게 예사다. 갈퀴손이든 아니든 밥에 매실장아찌를 얹어주는 정으로 생명은 자란다. 봄의 뜻이 그러한 것인지는 다 알 수 없어도.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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