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슬도 민박집 / 성환희

톰소여와허크 2020. 5. 10. 10:37




슬도 민박집 /성환희

 

 

그 해 여름

외딴집 2층 민박집에서

하룻밤 묵었는데

그 집엔 할머니 한 분 계셨어

 

할머니

낯선 사람 들여놓고

인사치레하시다

그만 깜빡 재미에 붙들리셨어

 

자식 자랑 손주 자랑

가신 지 오랜 영감 이야기

보따리 보따리 풀어놓고

일어나시질 않는 거야

(아이고 네 그렇지예?……)

예의바른 맞장구에 훅 가신 거였지

 

그러다 그날 밤

못 이기는 척

우리 식구 저녁 밥상 앞에도

낑겨 앉으시고

 

할매가 무슨 힘이 있겠노?

청소를 한 것 같기는 한데

그 왜 끈적끈적한 찌든 때 있잖아

영 거슬리는 기라

내가 도무지 찝찝해서 잠이 와야지

퐁퐁 풀어 안 문질렀나

나 참, 큰맘 먹고 휴가 가서

민박집 청소 해주고 왔다아이가

 

-『바람에 찔리다, 2019, 학이사

 

 

감상- EBS 티브이 프로그램 중 한국기행을 자주 보는 편이다. EBS 세계테마기행도 흥미롭지만 한 번이라도 따라갈 볼 일이 좀체 없을 것이란 인식이 있어서 인지 집중해서 보지는 않는다. 한국기행 속 몇몇 장면은 작심하기에 따라선 현실로 확인하거나 부딪쳐보는 일이 가능하고 실제 그렇게 해서 답사를 떠난 적도 수차례 된다. 한국기행에선 섬 이야기를 자주 다룬다. 섬은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외국에 간 것처럼 낯선 풍경, 풍습, 생태를 보여주기에 언제든 매력이 넘치는 공간이다. 때가 되면 배낭에 책 몇 권 집어넣고 섬에서 일없이 지내고 싶지만 아직까지는 희망사항으로 남겨두고 있다.

시인이 찾은 슬도는 이름이 익숙지 않아 검색해보니 진도군에 속한 섬과 울산 방어진에 속한 무인도가 뜬다. 시인의 주거지를 고려하면 울산 슬도 인근 민박집의 기억이 시의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다. 시인이 찾은 슬도는 다리가 놓여 육지와 이어져 있다. 뭍인지 섬인지 구분하기 애매하지만 이름을 좇아 섬이라 하자. 섬 여행의 재미 중 하나로 민박집 인심을 빼놓을 수 없다. 대개의 섬엔 젊은 층이 쏙쏙 빠져나가면서 아이들이 다니던 분교는 폐쇄되고 나이 든 어른들만 남아있다. 뭍으로 간 자식도 저 사는 일로 바쁘니 섬을 찾는 일이 뜸하다. 부업으로 민박을 놓은 주민들도 사람이 그립고 아이가 그립다. 그러니 어쩌다 시인 가족처럼 민박집 주인의 이야기에 호응해주고 맞장구칠 것 같으면 자식을 보듯 손자 손녀를 대하듯 정을 내는 일이 드물지 않다.

시인은 민박집 경험을 마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전기수(직업 이야기꾼)를 흉내 내어 전한다. 이야기는 재미가 생명이고 교훈은 덤이다. 외로운 할머니는 민박 든 가족이 남 같지 않아서 자기 신상과 처지를 줄줄 말하게 되고, 그 이야기를 듣는 시인 역시 할머니가 남 같지 않아서 굳이 퐁퐁 세제까지 떨어트려 가면서 바닥의 묵은 때를 매매 문질러 지웠다. 누가 시키면 한사코 안 할 일을 마음이 움직이면 스스로 행하게 되는 게 사람 사이 일이다. 주인에게든 손님에게든 행복한 기억이 아닐 수 없다. 일상 속에 자칫 소홀하기 쉬운 일들을 여행은 일깨워준다. 거문고 소리를 들려주는 슬도처럼 모든 섬은 자기 소리를 갖고 있다. 귀 한 쪽을 기꺼이 내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무려나, 뉴스는 조금 덜 보고 한국기행은 조금 더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화초옥도 / 우남정  (0) 2020.05.17
시인 / 황동규  (0) 2020.05.12
어머니, 서울에 눈이 내렸어요 / 김서나  (0) 2020.05.07
슬픔의 편 / 장인수  (0) 2020.05.02
갑질하다 / 정숙  (0) 2020.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