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詩人) / 황동규
고기를 잡지 않는 어부가 살았다
바다가 그의 귓전에 늘 머물러 있었다.
온 세상에 꾸중 들은 아이들만 보이는
어둡고 고요한 저녁이면
바닷속이 환히 뒤집어지기도 하였다.
어둡던 골짜기가 맑아지고
쌍쌍이 속삭이며
헤엄쳐오는 물고기들
허리에 오색(五色) 구슬 두른 놈도 있었다.
꼬리에 뽀오얀 등(燈)을 단 놈도
두리번거리다 되돌아가는 놈도
섬들이 긴 숨 들이키고
가라앉기도 하였다.
모든 강의 밑바닥 바다에 닿듯이
마음줄 모두 내린 어부가 살았다
아꼈어, 그래 참 환했어,
추억 속에 나란히 헤엄친 물고기에겐 듯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두 손 내민다
온 세상에 꾸중 들은 아이들만 보이는
어둡고 고요한 저녁이면.
-『악어를 조심하라고?』, 문학과지성사, 1986.
감상 – 시가 어떠해야 한다는 얘기는 시인의 수만큼이나 많고, 시인이 어떠해야 한다는 얘기도 적잖이 듣는다. 황동규 시인은 ‘고기를 잡지 않는 어부’를 시인에 견준다. 사실, 어부가 고기를 잡지 않으면 어부가 아니다. 생활을 말하지 않는 건 가짜라는 비판도 있을 법하지만 어부 이름은 그를 규정하지도 가두지도 못한다. 강태공 역시 한때 무늬만 어부였다. 물고기를 꿰지 않도록 일자 낚싯바늘을 써서 세월만 낚으니 일상생활이 될 리 없다. 물고기를 낚아 시장에 거래할 줄 모르는 남편을 견디지 못하고 아내는 집을 나가고 만다. 그런 강태공이 인생 후반기에 출세해서 현실적인 정치인이 되었으니 시인 칭호는 그의 인생 전반기에만 부여하거나 아예 박탈되거나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낚싯줄로 세월 낚는 시늉만 하고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불량 시인에 대한 경계심인지 황동규 시인의 어부는 낚싯줄 대신 마음줄만 내려놓는다. 그 마음은 “온 세상에 꾸중 들은 아이들”에게 열려 있으면서 형형색색의 물고기를 반겨 노닐기도 한다. 한마디로 마술과 동심의 세계인데, 만나는 사람에게 두 손을 내미는 어부의 모습에서 어부의 정체를 반쯤 알아차린 기분이 든다. 생활에 철저하게 무능했으며 거리에 쓰러져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던 두 어부의 이름은 김종삼과 천상병이다. 이들은 외상술을 얻지 못하는 날이면, 동료 문인들에게 빈 손바닥을 내밀어 술값을 얻어냈다. 김종삼은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에서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 빈대떡을 먹을 때 모여든 사람들이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천상병 시인은 추모시 「김종삼 씨 가시다」에서 종삼 형님에게 늘 신세지고 가르침을 얻었다고 했는데, 손바닥 내미는 것은 거꾸로 천상병이 원조일 가능성이 높다. 황동규 시인도 김종삼 시편을 높게 샀으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점박이 눈」를 썼다.
그러니 위 시의 시인 운운하는 것은 황동규 개인의 시인론인 동시에 그가 좋아했던 시인의 영향을 기록해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꼈어”와 “환했어”는 그 주체와 대상이 모두 생략되어 느닷없다는 느낌인데, 순진무구한 시인들의 아우라와 그를 좋게 보는 황동규 시인의 감정이 모호한 비율로 섞여 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온 것이 소풍인지 벌서는 것인지 둘 다 인지 수수께끼투성이지만 시인은 언제든 “꾸중 들은 아이들”을 편에서 함께 꾸중을 듣고 있는, 어둠 속에 얼굴을 펴는, 조금은 안돼 보이는 위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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