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실제 / 이육사

톰소여와허크 2021. 1. 13. 03:59

실제(失題) / 이육사


하늘이 높기도 하다
고무풍선 같은 첫겨울 달을
누구의 입김으로 불어 올렸는지?
그도 반 넘어 서쪽에 기울어졌다

행랑 뒷골목 호젓한 상술집엔
팔려 온 냉해지처녀(冷害地處女)를 둘러싸고
대학생의 지질숙한 눈초리가
사상선도(思想善導)의 염탐꾼 밑에 떨고 있나

라디오의 수양강화(修養講話)가 끝이 났는지?
장 구락부(俱樂部) 문간은 하품을 치고
삘딩 돌담에 꿈을 그리는 거지새끼만
이 도시의 양심을 지키나보다

바람은 밤을 집어삼키고
아득한 까스 속을 흘러서 가니
거리의 주인공인 해태의 눈깔은
언제나 말갛게 푸르러 오노

- 193512월 초야

 

 

감상 시의 제목인 실제(失題)는 맨 앞에 들어가야 할 이름을 잃어 버렸다는 것인데, 뚜렷한 방향이나 딱 맞는 뭔가를 얻지 못했을 때 일단 모호하게 걸쳐두는 제목이다. 실제(實際) 상황이 또 그러하다는 이중적 효과를 노린 제목이기도 하겠다.

시에서 다소 생경한 사상선도나 수양강화란 단어를 두고, 내선일체론과 황국신민화를 주입하려 했던 일본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란 시각이 있다. 이런 현실에서 거지새끼만 양심을 지킨다는 것은 다수의 지식인들이 친일로 돌아서거나 침묵으로 책임을 방기해버린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해석에 무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시의 배경이 조선이 아닐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우선, 시를 썼던 시기가 북경 체류 시절이다. 이육사는 의열단 주도의 조선군관학교를 수료하고 그 일로 국내에서 피검된 바 있지만 이 무렵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서 북경대학에 적을 둔 걸로 알려져 있다. 이육사가 보기엔 대학생으로 대표되는 그쪽 지식인들의 모습도 조선의 지식인 못잖게 실망을 주었나 보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제국주의 침략이 노골화되었는데도, 생계수단을 잃고 술집에 팔려온 여자에만 관심을 기울이니 지질맞다는 것이다. 그것도 당국(국민당?)의 눈치를 봐가면서, 마장(마작)에도 손을 떼지 못하고 말이다. 정작 해야 할 일은 외면하는 도시의 불량 양심들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를 쓰고 우연인지 아닌지, 1935129일 북경대학 학생 중심으로 국공 내전 중지와 일본과의 싸움을 독려하는 운동이 퍼져나갔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면, 시인이 언급한 해태도 광화문 앞의 해태상이 아니라 북경대학에 있는 해태상으로 짐작이 된다.

물론, 시작 배경이 그렇다 하더라도 이육사의 눈과 마음은 조선에 닿아 있는 건 두말할 필요 없다. 해태는 전설적인 동물이다. 악을 물리치고 법과 정의를 실현하는 염원을 담고 외뿔을 세우고 있다. 그런 해태가 눈을 깜박이긴 했을까. 이육사는 끝내 광복을 보지 못했지만 일본은 패망해서 물러났다. 시인은 해태의 눈이 언제쯤 말갛게 푸르러 올 것인지 묻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대답은 여전히 궁할 뿐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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