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애, 『시간의 황야를 찾아서』, 학이사, 2020.
- 대구 경북 문학기행이란 부제에서 보듯 답사 관련 산문집인데 우선 반가운 느낌이 드는 건 눈에 익은 공간과 사람들이 주는 정서적 감응 때문에 그럴 테다. 반대로 눈에 설지만 평소 궁금했던 공간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도 충족할 수 있다. 이런 기대감이 실제 독서의 재미로 이어지기 위해선 아는 사실도 새롭게 환기할 필요가 있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까지 알려주면 좋을 텐데 작가 천영애의 삶과 풍부한 배경지식까지 더해서 듣는 『시간의 황야를 찾아서』를 그렇게 읽었다.
개인적으로 버스 타면 금방 갈 수 있는 거리에 약전 골목이 있고, 대구 약전 골목은 갈수록 쇠하여지지만 유서 깊은 건물은 여전히 많다. 작가는 김원일 소설가의 ‘마당 깊은 집’(김원일이 살던 실제 공간은 다소 불명확하고 이쯤일 것이란 주변을 특정해놓음. 대신 인근에 전시 공간이 있음)을 찾는다. 소설 속 길남의 동생 길수는 김원일의 실제 동생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 김원일의 동료 작가인 구활의 글을 통해서 소개한다. 주인 할머니에게 점심 끼니를 얻어먹은 길수를 어머니가 냉정하게 저녁밥을 굶기는 장면에서 작가는 자신의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다. 남의 집에 놀러가더라도 식사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오고 서서 음식을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던 아버지다. “아버지의 그 말은 길남이 어머니의 말과 같다. 가난하더라도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것은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규칙들을 그 세대의 사람들은 그렇게 가르쳤다”고 작가는 이해한다.
빈부로 갈린 세상, 굶주림에 무슨 체면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가난도 나누면 좋을 것이란 생각도 들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가난하여 서로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마음으로도 읽힌다. 작가는 서른 이후에야 서서 먹게 되었다는 말을 남겨두었다.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고, 나 역시 십여 년 살았던 경산과 관련하여 작가는 동요 <어린 음악대>를 작곡한 김성도를 소개한다. 하양초등학교에 김성도 문학비를 건립할 때 스물한 살의 작가도 한 자리 끼였든 추억이 있다. 또 경산과 관련하여 이동하 소설가의 ‘우울한 귀향’을 읽는다. 소설 속 귀향 장소는 지금은 기차가 서지 않는 삼성역이다. 작가는 낡은 역사에서 여름의 찔레꽃을 보면서 그나마 벚꽃 필 때 사람이 찾는다는 걸 다행으로 여긴다. 이동하가 다녔다는 남천초등학교 그 앞의 느티나무는 소설 속에서 연이 나뭇가지에 걸려있었고, 이를 확인하는 작가의 눈엔 늙어서 둥근 허리를 휘고 있는 나무가 보인다. 나 역시 나무 밑에 주차해둔 채 아이들을 운동장에 풀어놓고 나무를 몇 번 쳐다보았던 인연이 있다. 그런 만큼 이동하의 소설을 아직 읽지 않았지만 맨 꼭대기 나뭇가지를 보게 되면 저쯤에 연이 걸리기도 했겠구나 하고 끄덕이게 될 것이다. 소개된 소설 내용은 좌우 이념 대립의 희생을 소재로 하고 있다. 빨갱이나 부역자로 몰려서 마을에서 실려간 사람들은 예서 조금 떨어진 산골짜기 폐광에 매몰된다. 경산 코발트 광산이다. 3천 구에 가까운 시신이 아직 폐광에 묻혀 있음을 말하며, 작가는 “우리 모두는 과거로 우울한 귀향을 해야 할 것이며 지우고 묻기보다 드러내고 보존하는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기억 속의 사람들은 삼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먼 여행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끝을 맺는다.
누군가에게 이 탑을 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는 영양 봉감모전 오층석탑(산해리 오층모전석탑), 김시습이 남산 아래를 보며 울분을 달랬을 용장사지 삼층석탑에 대한 감격은 내 마음이 또한 그러했음을 상기하게 된다. 문인수 시인이 아버지와 소와 검둥이가 함께 귀가하던 풍경을 노래하던 성주 방올음산 아래 생가터, 박인로를 좇아 영천 도계서원에서 영천댐 상류를 돌아 입암에 이르는 길, 김동리의 ‘무녀도’와 관련된 예기소나 모화역은 새로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인다. 시간의 황야엔 과거와 현재를 간보며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숨은 이야기에 궁금증이 생기면 해결은 간단하다. 책을 읽거나, 길을 나서거나.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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