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에세이> 아, 전태일!

톰소여와허크 2021. 1. 26. 12:55

 

안재성 외, , 전태일!, 목선재, 2020.

 

 

2020년 전태일이 떠난 지 50년을 맞아서 전태일을 기념하는 여러 책들이 출간되었다. 최소한의 근로조건을 밝힌 근로기준법을 지켜서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대우를 받기 원했던 전태일의 꿈은 다수의 노동자들에겐 이루어지지 않았다.

건설현장의 추락사,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를 연속적으로 겪으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까지 앞두고 있지만 기업과 노동자 양쪽에서 법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전망이야 다를 수 있어도 노동자의 안전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게끔 인식을 바꾸고 실제 투자를 하면 되는 것이다. 통계치가 조금씩 다른 걸 감안하더라도, 매일 3-5명 정도가 산업재해로 사망한다.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그 두 배 이상이 되고, 좀처럼 믿기지 않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례는 교통사고 사망자 수의 서너 배에 이른다는 통계치를 보게 된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자를 어렵게 구해서 너덜너덜할 때까지 읽었다지만 지금은 인터넷 검색만 해도 노동 상황을 웬만큼 알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스로 불꽃이 된 전태일을 불러오는 건 의미가 있어 보인다. 전태일이란 이름으로 죽음으로 내몰린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전태일의 운명이다.

, 전태일!에서 안재성은 전태일의 생애를 기술한다. 전태일은 헌옷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마련해준 중고점퍼를 얇은 옷을 입고 다니는 재단보조에게 내준다. 자신도 가난하지만 더 가난한 사람에게 마음을 내주는 됨됨이가 전태일을 만든 것이다.

또 한 명의 저자인 이병훈은 전태일이 살았던 시대와 전태일 이후의 사회변화를 기술한다. 당시 현실은 전태일 가족이 내건 전태일 장례식 시행의 8대 조건을 거꾸로 읽으면 된다. 노조 결성을 인정하라, 하루 16시간 일하는 것을 8시간으로 줄여라, 2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매주 한 번 쉬게 하라, 정기적인 급료를 검토하라는 조건이 등장한다.

맹문재는 전태일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문학 이야기를 한다. 전태일이 초고로 작성해둔 소설엔 선생님, 우리 고용주 되시는 사람에게 저의들의 뜻을 전하게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갈망합니다. 적당한 빵과 적당한 휴식을 말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앞서 16시간의 노동이 절반으로 줄고, 5일제가 정착되고 주4일제까지 꿈꾸어 보게 되는 건 휴식과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알아보고, 안 것을 어떻게든 실천하려 했던 노동자 전태일 또 그 이후의 제 2, 3의 전태일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과 관련하여 영화감독 박광수와 평론가 윤중목이 주고받은 대담이다. 맹문재 시인과 윤중목 시인은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한 바도 있다. 영화 속 문성근이 연기한 김영수엔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노동운동을 하던 장기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김근태의 모습이 조금씩 담겨 있다. 김영수가 실제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큰데, 애초에 이소선 여사는 이 점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영래는 전태일이 기다렸던 이상적인 대학생 친구였겠지만 전태일 생전에 그런 친구는 오지 않았다. 영화는 이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나중에라도 확인해봐야겠다.

내게 , 전태일!의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뒤표지에 실린 윤중목의 시 한 편이다. 폐교에서 생태학교로 거듭난 교정에 갔더니 눈에 익숙한 이승복 동상이 있는데, 시멘트 기단에 적힌 이름이 전태일이었다는 내용의 시다.

 

오호, 정말이지 이건 통쾌하고 유쾌한 일이었어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정식학교라는 공간에 위인동상으로 세워진 아마 사상 최초의 사건이었어요.”(위인동상 3)

 

실제 사건의 취재 여부와 진실 공방을 떠나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란 웅변은 기성세대의 영육을 장악한 반면에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는 육성은 다들 무심하게 지나오며 몰래 복사본으로 도는 이야기를 손에 땀을 내며 읽어야 했다. 이런 분위기를 웃으며 이승복 대신에 전태일이 우리나라 위인동상 3등 되면 큰일이 나는 거였어요?”라고 짓궂게 묻는 시인에게 1등 돼도 뭔 큰일이겠냐고 한 표 거들고 싶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