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쥐 / 채형복
호미로 이랑 헤집어 고구마를 캐는데
놀란 들쥐 한 마리 후다닥 뛰쳐나온다
나락농사도 짓지 않는 산촌인데
볏짚은 어디서 구했을까
가늘고 보드라운 지푸라기 곱게 깔아
땅속에 작은 집을 앙증맞게도 지어두었다
도심의 고급 아파트 부럽지 않은 저만의 집을 지어
마음씨 고운 아내와 자식새끼 두엇 낳고
단란한 가정 꾸려 한겨울 날 요량이었나
잰걸음으로 도망치는 들쥐의 뒷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나 먹고 살자고 그의 소박한 꿈 깨트리고
집마저 부수고 짓밟아 버렸으니
이보다 더한 야만이 있을까
간밤에는 첫서리 내려 거실 유리창에
뾰족한 가시처럼 성에가 돋았다
세상천지 오갈 데 없는 들쥐는
밤새 오들오들 떨면서 한뎃잠 자지나 않았는지
아침으로 뜨끈하게 삶은 고구마 한입 베어 먹는데
생목이 막혀 자주 찬물을 들이켰다
『무 한 뼘 배추 두 뼘』, 학이사, 2021.
감상 : 시인은 법과 인권을 공부하고 나누는 법학자이자 교수로 일하면서 현재는 텃밭 농사까지 공부하고 있다. 어떤 날은 상추를 걱정하고 옥수수를 생각하고, 또 어떤 날은 바랭이와 질경이를 사지로 밀기도 하면서 그때 겪게 되는 고민을 얘기하기도 한다.
위 시는 텃밭 고구마를 캐다가 들쥐의 보금자리를 허물게 된 사연이다. 낟알 하나도 소중히 여기던 농경사회의 유전자를 간직한 다수에게 쥐는 곡식을 탐하고 병을 옮기는 해로운 짐승일 뿐이다. 방에 든 쥐를 위해 이부자리까지 내준 권정생 같은 특별한 분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쥐덫과 쥐약과 끈끈이를 동원하고 고양이를 내세워 어떻게든 쥐를 안 보고 지내기를 소원한다.
시인은 텃밭에 둥지를 튼 쥐의 출몰에 잠깐 놀랐겠지만, 이내 자신보다 쥐의 입장을 더 깊고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모든 생명의 존재 가치를 생각하는 생태주의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어서다. 또한, 인권 학자답게 집을 잃고 오갈 데 없이 된 사회적 약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작용하고 있는 걸로도 보인다.
약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선하고 의롭다. 한자 선(善)이나 의(義)에는 공통적으로 양(羊)이 있다. 양은 젖과 고기와 털과 가죽을 제공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능력은 부족하다. 그저 순하기만 약자의 이미지가 있는 것이다. 이런 약자를 우선 생각하고 말하는 게 선함이고, 약자를 자기 위에 섬기는 것을 의로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야만”은 이런 약자를 생각하지 않고 벌이는 행위다. 하루아침에 벼랑으로 몰리는 삶을 아파하지 않는 야만의 세상이라면, 들쥐의 날 세운 이빨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비꽃 / 박광영 (0) | 2021.05.30 |
---|---|
양지쪽 / 권명옥 (0) | 2021.05.26 |
시인의 얼굴 / 이민호 (0) | 2021.05.15 |
김종삼 / 정진규 (0) | 2021.05.07 |
길음시장에서 / 박중식 (0) | 2021.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