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 / 박광영
석현동 한전 옆 골목길에는
제비꽃들이 산다
벽돌담과 맞닿은 구석마다
빼꼼히 줄지어 서 있다
직각으로 만나는 깡마른 틈새마다
어떻게 가느다란 뿌리를 뻗어 내렸을까
화성에 처음 내린 탐사선처럼
그 제비꽃 마을에서 살았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바람에 흔들리며 어렵게 착륙했겠지
한 손톱만큼도 안 되는 흙에서
싹을 틔웠겠지
봄이면 한전 옆 골목길에 간다
작은 생명의 우주가 숨 쉬는 곳으로
-『그리운 만큼의 거리』, 시와정신, 2018.
감상 – 소설 『모비딕』엔, 지구가 짐마차 한 대 분량의 흙 정도로 거래되어 은하수 늪지를 메우는 데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는 표현이 있다. 우리가 크게만 생각하는 일들의 또 다른 진실을 보여주는 상상력이다. 반대로 골목 가장자리 빈약해 보이는 제비꽃 하나에서 “작은 생명의 우주를 보는 것”은 작게만 생각하는 것들의 큰 존재감을 보여주는 상상력이다.
몇 세대에 걸쳐 골목에 자리를 잡은 시인의 조상과 그 골목에 피어나는 제비꽃은 겉으로 무관해 보여도 그 곳에 어떻게든 뿌리 내리고 살아가려는 몸짓은 다르지 않다. 가물어 깡마른 날에도, 비바람 모진 날에도 삶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밥과 물을 긷는 하루의 노동으로 자식을 건사하는 데도 부지런했을 골목 사람과 제비꽃이다. 골목 안까지 드는 햇빛이 맞춤하게 느껴지는 날, 서로를 기특하게 보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골목을 떠난 시인이 골목을 찾는 것은 인연이 다하지 않고 아직, 골목과 뿌리로 연결되어 있어서다. 그 골목에서 만나는 제비꽃의 건재도 고향 어른의 안부처럼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하지만 봄이 와도 뜸해진 제비처럼, 도심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골목의 운명도 제비꽃의 내일도 불안한 시절이다. 큰 것을 작게 보고, 작은 것을 크게 보는 상상력이 제비꽃의 안녕에 도움되는 쪽으로 작용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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