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쪽 / 권명옥
양지쪽은 언제나 바늘을 든
내 꿈 같은 신기료 영감
그가 그늘에 놓아기른다는 약대랑 나는
언제나 그만치 푸르름이 되어 놀곤 하였다
짙푸른 요단江이 그의 손가락질 끝에 남실거린
언덕바지,
내 어머니의 身恙의 나날들이 잔 물결을 이루어
따라나서는
어느 날 센 물살에 흰 허벅지살 흘린
내 어머니의 音癡의
계절
그 영감텡이가 醫人이라고,
聖누가라고
듣는 오늘은
그 새 약대 새끼 여러 마리 걸리운다는
내 잠이 이만치 푸르게 자라다가는 닫히었다.
-『남향』, 열화당, 2004.
감상 – 권명옥은 김종삼을 좋아하여 『김종삼 전집』을 내고 해설을 달았다. 김종삼이 남긴 시편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했던 권명옥은 그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딱 한 권의 시집을 남겼을 뿐이다. 시집엔 박남수 시인을 떠올리며 쓴 시가 세 편 있다. 회현동 고갯길을 따라 오르며 지금은 가고 없는 노인을 거듭 생각하는 것인데 그 노인이 박남수다. “이 세상의 / 어떤 길은 발길 한 번 쏘이면 / 푸르름이 되노라고”(「푸르름」) 말하며 박남수가 남긴 흔적을 추억한다.
이처럼 권명옥에게 ‘푸르름’은 그립고 아름다운 것에 주어지는 것인데 「양지쪽」도 마찬가지다. 김종삼이 「그리운 안니 로니」에서 말한 푸름의 이미지도 겹쳐 보인다. 권명옥의 시편도 김종삼처럼 조어에 신경 쓰고 문장 연결엔 친절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이를 깊게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다.
「양지쪽」의 서사를 이으면 이렇게 될 것이다. 신기료장수가 바늘로 신을 깁는 것을 한참 보던 어린 화자는 어머니 곁으로 온다. 성당에 다니는 어머니는 신병을 앓고 있다. 어머니는 노래를 흥얼거리지만 노래를 잘하는 편은 아니다. 어머니는 복음이나 노랫말에 등장하는 성 누가에 대해서도 말한다. 성 누가는 누가복음을 쓴 장본인으로 의사이면서 예수 어머니 초상화를 그렸다는 얘기도 있다. 부자가 천당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게 쉽다는 누가복음 한 구절을 어머니가 읊기도 했겠다. 어머니 말씀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화자는 신기료 영감을 따라온 낙타가 자기 앞을 쓱쓱 지나가는 환영을 본다. 그 즈음이면 눈꺼풀이 아예 닫히고 만다.
이처럼 「양지쪽」은 그리움이 모여 산 흔적만으로도 따스하다. 시인이 어머니를 추억하는 시간은 요단강 물결처럼 푸르고 아늑하게 느껴진다. 동시에 신기료 영감을 상상하며 꿈을 깁던 일들이 훗날 예술적 감각을 꽃 피우게 하는 시초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양지쪽 슈퍼에 탁자를 내고 박남수, 김종삼, 권명옥을 불러내어 옛 이야기 듣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이젠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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