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3월에 내리는 눈 / 이강하

톰소여와허크 2021. 7. 22. 08:33

3월에 내리는 눈 / 이강하

 

 

그에게 전화를 받고부터 내 서쪽은 온통 눈밭이에요 남천 그라비올라 일월금 사이에도 눈이 내리고 있어요 내 혀가 하얗게 변해서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할 때라고 생각되었는지 세 아이의 귀가 연기처럼 펄럭거려요 나는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을 읽다가 기다란 의자를 바라보아요 적진에서 돌아와 결국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그의 소식을 듣고 자꾸 슬퍼져요 그가 놓고 간 와인 잔에 눈을 소복이 받아요 어스름 섞인 눈송이가 밤을 늘리고 서쪽을 늘리고 다시 사과나무 꽃이 된다는 사실이 더 슬퍼서 마시고 또 마셔요 창밖 발자국 소리가 사과 깎는 소리 같아요 저 멀리 봉분들이 짐승처럼 울고 있나요 생강꽃 핀 언덕길, 당나귀를 타고 가는 누군가가 보이나요 그에게 손과 발이 되어 주지 못한 오늘이 싫어져서 나를 놓아버리고 싶은 밤, 그의 얼굴이 창가에서 진눈깨비처럼 날리고 있네요

 

-『파랑의 파란, 시와반시, 2021

 

 

감상 사람은 누구든 죽음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이지만 애써 기억하지 않을 뿐이다. 가까이 알고 지내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멀어지는 일도 인생의 불가피한 장면이지만 수습이 안 될 만큼 마음의 파고가 높아지기도 한다.

시인은 어떤 이별의 예감과 그로 인한 괴로움에 직면해 있다. 시인은 몸과 맘은 눈밭이 보이는 서쪽으로 기운다. 서쪽은 오전 대신 오후, 기쁨 대신 슬픔을 들이는, 이전보다 죽음에 익숙해지는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서쪽을 늘리며 이별을 슬퍼하고 있고, 그 슬픔은 지극하고 깊다. 또한 그 슬픔은 유정할 대로 유정해서 슬픔 속에서도 정화되는 느낌이 있다.

시인이 읽고 있는 김종삼의 북 치는 소년내용 없는아름다움이 연결되며,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로 마감된다. 반면에 이강하의 3월에 내리는 눈은 눈송이가 사과나무 꽃으로 변하는 시간 속, 슬픈 것과 아름다운 것이 환상적으로 교차한다. 그 환상을 깨는 건 뜻밖에도 시인 자신이다. “진눈깨비로 귀결하고 마는 시편엔 누군가의 손과 발이 되어 주지 못한 오늘을 반성하는 현실적 자아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말하자면, 이 시는 창밖 발자국 소리를 사과 깎는 소리로 들을 줄 아는 특별한 감수성과 밤마다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텐트 2) 시인의 내적 성찰이 만나 결실한 것이다. 이런 수고로움이 있어서 크리스마스 카드의 울림 못잖은 감동을 3월의 눈이 갖게 되는 것일 테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을 사랑한 게 / 강우현  (0) 2021.08.07
구내식당 / 허연  (0) 2021.08.02
옛날에는 금잔디 / 문형렬  (0) 2021.07.16
고양이 가족과 안성탕면 / 이철  (0) 2021.07.12
바다 옆의 방 / 이운진  (0) 2021.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