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김종삼 전집 / 장석주

톰소여와허크 2021. 8. 13. 21:48

김종삼 전집

-주역시편 22 / 장석주

 

 

정처없는 마음에 가하는

다정한 폭력이다.

춤추는 소녀들의 발목,

혀 없이 노래하는 빗방울,

날개 없이 날려는 습관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정표,

또다시 봄이 오면

누가 봄을 등 뒤에 달고

벙거지를 쓰고 허청허청 걸어간다.

그가 누구인지를

잘 안다. 오리나무에서 우는 가슴이

붉은 새여,

오리나무는 울지 않고

바보들이 머리를 어깨에 얹은 채 지나가고

4월 상순의 날들이 간다.

밥때에 밥알을 천천히 씹으며

끝끝내 슬프지 않다.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고

오직 기일과 함께

돌아오는 5월의 뱀들.

풀숲마다 뱀의 고요의 형상을 하고

길게 엎드려 있다.

감상적으로 긴 생이다.

배를 미는 길쭉한 생 위로

얼마나 많은 우아한 구름들이 흘러갔는가.

개가 죽은 수요일 오후,

오늘이 습기를 부르는 바람이 분다.

날은 벌써 더워지고

봉우리마다 커다란 적막이 깃든다.

하루가 일목요연하지는 않다.

나를 찾고자 한다면

부디 빨리 찾기 바란다.

숨은 자는 발각되기 마련이다.

김종삼 전집이 서가에서 보이지 않는다.

나는 흙냄새를 맡는다.

죽은 아버지와 죽은 개와 죽은 새는

카론의 나룻배를 타고

황천을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

6월이 오고,

6월이 끝날 때까지

입술을 깨물며 음악을 견딘다.

 

-『오랫동안, 중앙북스, 2012.

 

  감상 – 장석주 시인의 말에 따르면 주역을 안다고 하면 가짜고 모른다고 하면 어리석은 거란다. 주역을 읽은 시인의 보람은 모름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데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런 모름 혹은 앎을 잣대로 시를 마음대로 읽자면, 시인은 4월부터 6월까지 두어 달의 주변 변화와 신수(身數)를 읽는 중이다. 그 변화에 대한 설명은 “다정한 폭력”이란 말처럼 결코 친절하지 않지만 시의 분위기를 보건대 안팎으로 잘나가는 운수가 아니라, 안에서 견뎌야 하는 시간이다. 누군가의 기일이 돌아오고 연이어, 죽은 김종삼, 죽은 아버지, 죽은 개, 죽은 새를 떠올리는 쓸쓸함과 함께 “숨은 자”로 지내야 하는 점괘도 작용했을 것이다. 시인은 음악을 견딘다고 했는데, 시인 중에 그 음악에 가장 심취했던 이가 김종삼 시인이기도 하다.

『김종삼 전집』은 출판사를 바꾸어 가면서 세 번이나 출간되었는데 그 첫 번째 출판을 맡은 이가 장석주 본인이다. 장석주가 문단에 갓 데뷔한 시절, 광화문 거리에서 만난 김종삼은 다짜고짜 손을 내밀어 장석주 주머니의 돈을 얻어간 일이 있다고 했다. 손바닥을 내어 얼마간의 용돈을 구하는 건 천상병과 다르지 않다. 천상병은 김종삼을 종삼 형님이라고 부르며 종삼에게 용돈을 얻기도 한 사이니 손바닥 원조가 누군지 살짝 헷갈린다.

위 시에서 벙거지를 쓴 이도 김종삼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김종삼전집이 서가에 보이지 않을 때 장석주 시인은 “숨어 있는 자는 발각되기 마련”이라고 했다. 주류에서 벗어나 있던 김종삼뿐만 아니라 그런 정신을 갖고 있는 예술가에게 또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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