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장날 / 황경민

톰소여와허크 2021. 9. 30. 19:55

장날 / 황경민

 

고령 시외버스터미널 차타로 나가는 곳

차타로 나가는 사람만 있으니 차타로 나가는 곳

모욕하러, 장보로, 볼일보로 나온 할매들

차타로 나가는 곳으로 나와

뜸하게 오는 차를 기다린다

담배도 풉고, 오뎅도 묵으며...

 

바라! 영숙네 아이가?

누고? 아이고 봉수이행님, 모욕하로 왔는교?

언지러 모욕 벌시로 했다. 인자 집에 갈라꼬.

내는 인자 나오요.

오이라. 요 안자가 오뎅 하나 무라.

아이요, 아지매? 요 오뎅 오백은어치만 주이소.

아이다. 내는 두 개나 무따. 니나 무라.

? 한 개 더 무이소. 모욕한다꼬 심 다 빼실낀데.

그래, 니 요새 아프다카더만 개않나?

머 맨날 고만고만 합니더... 행님?

?

아있고? 합천행님. 올 가실에 죽어삣다요.

? 김천댁?

말고. 저 재 너모에 살던 합천댁.

아아. 순심이 어매?

야아. 올가실에 즉어삣다요.

잘 죽었다.

야아. 잘 죽었소.

오래 살았지러.

그라모요 오래 살아지예.

잘 죽었다.

야아. 잘 죽었심더.

...............

 

고령 시외버스터미널 차타로 나가는 곳

차타로 나가는 사람만 있어서 차타로 나가는 곳

모욕하러, 장보로, 볼일보로 나온 할매들

담배도 묵고 오뎅도 묵고

뜸하게 오는 차를 슬렁슬렁 기다린다

 

-『통화 중일 때가 좋았다, 글상걸상, 2021.

 

감상 대구 화원장(1,6), 그 옆으로 올라가면 성주장(2,7), 성주에서 내려서면 고령장(4,9), 고령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면 합천장(3,8), 고령과 합천 아래 창녕장(3,8)……. 오일장 찾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행이라고 해서 낯선 도시에서 설렘을 맛보고, 힐링이 되는 아름다운 풍경을 찾고, 문화 유적지를 탐방해서 공부하고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거다. 박경리 작가는 설거지하는 것도 여행이라고 한 바 있지만 장날의 먹거리, 볼거리, 사람 사는 모습에서 여행 기분을 낸다면 이 또한 여행이다. 장터 돼지국밥이나 노점 오뎅이 보여주는 입맛에 감동하는 일도 드문 건 아니다.

황경민 시인은 영도다리와 산복도로를 사랑하는 부산 출신인데 언제 고령 장날에 왔을까. 모욕인지 목욕인지 이곳 사람들보다 사투리를 더 그럴듯하게 구사하면서 그윽한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 장날 합천댁의 죽음을 전하고 듣는 두 할매는 한 목소리로 합천댁이 잘 죽었다고 거듭거듭 말한다. 오래 살고 병고 없이 죽었다는 호상의 의미겠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자신의 일로 걱정해야만 하는 노년의 처지가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노인이 좀 더 대우받고, 노년의 병치레만큼은 자식 눈치 보는 일 없도록 국가가 완전하게 책임지는, 그런 안전망이 구축된 사회였다면 잘 죽었다는 말도 더 아껴 사용할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잘 죽었다는 말은 결코 모욕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선 나이 불문하고 바라게 되는 목표의 의미도 있다. 그럼에도 그 근심을 덜어 현재를 가꾸고 현재를 잘 사는 데 더 집중하는 길이 있다면 그리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거다. 잘 먹고 잘 보고 잘 살고 잘 늙는 길을 배우러 주말 오일장을 검색해본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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