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칸나 / 임창아
셋방 한 칸이 신접살림 전부였을 때, 아버진 서울이 처음이었다 딸 살림 보러온 아버지는 쌀도 아니고 고등어 아닌 구근 몇 개 들고 와서는 마당 한구석에 심었다
땅속에서 저를 밀어 올렸다가 쓸어내리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몸살로 조퇴하고 직장에서 돌아온 어느 날, 키만큼 큰 꽃나무 아래서 속 다 비우고 고개 드는데 빨간 꽃이 꽃대를 올리고 있었다
아찔한 붉은 빛으로 헤프다 싶은 브로치 가슴에 달고
아무도 만나자는 사람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갈 데도 오라는 데도 없이 내 속병은 꽃대만 열심히 밀어 올렸다
불안한 꽃대 위로 잠자리 몇 바퀴 돌다 갔고, 구름이 그 위를 비켜 지나갈 때 언뜻 아버지 얼굴이 스쳤다
『즐거운 거짓말』, 문학세계사, 2017.
감상 – 칸나는 여러해살이 풀이지만 월동이 어려워 구근(덩이뿌리)을 보관했다가 이듬해 다시 심어 꽃을 보는 경우가 많다. 푸른 이파리도 듬직하고 긴 꽃대에 말려있던 꽃잎이 한 장씩 피어나면 그 색감이 유난히 붉어서 강렬한 인상을 준다. 백일홍이나 달리아처럼 여름부터 가을까지 꽤 오랜 기간 피고 지니, 골목길 화분에서 종종 만나게 된다. 특히, 칸나는 자리만 잘 잡는다면 2미터 가까이 키를 키우니 나무도 아니면서 든든한 배경으로 인식될 만하다.
아버지의 딸은 낯선 서울에 와서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인생을 펼치려고 하지만, 그 무대가 아주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셋방, 방 한 칸이라는 가난이 주어진 현실이기 때문이다. 서울 집을 방문한 아버지는 딸의 미래를 빌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덩치를 키우면서 이파리 짱짱하고 꽃잎 화려한 칸나처럼 딸의 삶이 그렇게 꽃 피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버지는 서울에 오지 않아도, 아버지가 심은 칸나는 때가 되어 꽃을 피운다. 각박한 서울 생활에 몸이 아프고 맘이 지칠 때 딸은 칸나에게 온다. 칸나는 겉으로 반짝이면서 실은 값싼 모조품일 수 있는, 그래서 더 정겨울 수 있는 가슴의 브로치를 닮았다. 아버지는 칸나에서 화려함을 봤을지 모르겠지만, 딸자식인 시인은 화려해 보이는 이면에 촌티 나는 진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세상을 살려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은 거다.
생각하면 칸나는, 누가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붉게 피어난 거다. 칸나의 구근이든 나팔꽃의 씨앗이든 누군가의 마음밭에 심는 일로 인해 세상은 얼마쯤 붉어지는 것이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복사미륵불친견기 / 복효근 (0) | 2021.12.05 |
---|---|
밥 무덤 / 허정 (0) | 2021.11.26 |
먹고 사는 일 / 김창제 (0) | 2021.10.11 |
장날 / 황경민 (0) | 2021.09.30 |
자화상 / 박세영 (0) | 2021.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