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 구절 / 정지용
집 떠나가 배운 노래를
집 찾아오는 밤
논둑길에서 불렀노라.
나가서도 고달프고
돌아와서도 고달팠노라.
열네 살부터 나가서 고달팠노라.
나가서 얻어온 이야기를
닭이 울도록,
아버지께 이르노니  ̄
기름불은 깜박이며 듣고,
어머니는 눈에 눈물을 고이신대로 듣고
이치대던 어린 누이 안긴 대로 잠들며 듣고
윗방 문설주에는 그 사람이 서서 듣고,
큰 독 안에 실린 슬픈 물같이
속살대는 이 시골 밤은
찾아온 동네사람들처럼 돌아서서 듣고.
 ̄ 그러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있던 시원찮은 사람들이
끝내지 못하고 그대로 간 이야기이니
이 집 문고리나, 지붕이나,
늙으신 아버지의 착하디착한 수염이나,
활처럼 휘어다 부친 밤하늘이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전하는 이야기 구절일러라.
-《신민》 21호, 1927
감상 – 옥천 출신인 정지용(1902-1950)은 옥천공립보통학교 재학 중인 열두 살에 결혼을 했다. 이후 서울로 유학길에 올라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교 장학금을 받아서 일본 동지사 대학을 1929년에 졸업했다. 동지사 대학은 정지용을 좋아했던 윤동주가 일경에 검거되기 전에 공부하던 곳이기도 하다. 동지사 대학 졸업하자마자 정지용은 휘문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한다. 휘문고 일 년 선배 김영랑과 일 년 후배 이태준과는 졸업 후에도 각별한 사이로 지냈다.
이 시는 발표연도로 보아 일본 유학 중 고향집을 다니러 왔던 차에 썼던 걸로 보인다. 정지용이 논둑길에서 불렀던 노래는 귀향 때마다 달랐을 순 있지만 1926년엔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공전의 히트를 친 해이니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는 노래를 흥얼거렸을 가능성이 있다. 고향 오는 마음이 가벼울 만도 한데,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노래 가사의 영향인지 자기 생이 고달프다고 연신 말하며 이십 대 중후반을 지나는 젊은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막상 집에 닿아서는 분위기가 반전된다. 가족과 이웃의 태도에서 가정의 귀한 아들이며, 벽지 출신의 수재에게 보내는 온정과 기대와 사랑이 가득하다. “독 안에 실린 슬픈 물”이란 표현을 썼어도 그 슬픔은 비극적인 정서를 환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중하고 고요하고 그윽한 정서에 닿아서 야단스럽지 않은 시인의 태도에 신뢰감마저 생기게 해준다. 남편을 바로 대하지 못하고 문설주 잡고 남편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아내와 그런 아내를 의식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도 한 편의 명화를 보는 듯하다.
시인은 자신의 안부나 이야기가 결코 잘난 사람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고, 못나고 시원찮아서 더 정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연장선상이란 걸 안다. 또 이전과 단절된 이야기가 아니라 집안의 오래된 가구처럼, 아버지의 수염처럼, 고향의 밤하늘처럼 다습고 은은한 이야기란 것도 시인은 함의하고 있다.
정지용으로부터 우리말을 잘 구사한다고 상찬을 받았던 김영랑은 고향 강진으로 가지 못하고 육이오 때 서울에서 사망했다. 정지용은 『무서록』을 쓴 이태준도 높게 평하면서 미술은 그의 천품이요 문장이었다고 했다. 북쪽을 선택해간 이태준이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글도 남겼지만 이태준은 육이오 이후 북쪽에서 숙청당한 걸로 알려져 있다. 정지용 본인도 육이오 도중 폭격을 당해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정지용은 《문장》을 통해 청록파 시인과 박남수, 이한직 시인을 데뷔시키고, 윤동주의 유고 시집 서문에 무명의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겼다며 그를 세상에 내보내는 데도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런 정지용이 “나도 늙어 맑고 편히 살으리라. 두보와 같이 술을 빚어 마시리라. 봄비에 귤나무를 옮겨 심으리라. 손을 씻고 즐거운 글을 쓰리라”(‘수수어1’ 중)고 소원을 가졌지만 그의 바람은 전쟁이 앗아갔다. 우리가 품는 지금의 꿈도 곧 옛이야기가 되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술 빚고 나무 심는 정도의 꿈, 그 정도의 평화가 옛이야기의 배경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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