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빛 금목서 나무 아래에서
레퀴엠 3-9 / 노태맹
황금빛 바람 불고
붉은 풀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눕는 가을 들판을
오늘은 너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하기야 이제는 너의 풍경이 나에게만 남아 있어
이 눈물이 무슨 소용인가도 싶지만
가을 다하도록 날아다니는 잠자리 한 마리처럼
이 가을 나의 슬픔은 악착같다.
이런 날 너와 소주잔 부딪치며
길가 어느 식당에서 삼겹살 구워 먹고 싶은데
그저, 내가 네 앞에 앉아 있기만 해도 좋을 텐데,
어슬렁거리는 걸음 같은 어둠은 오고
골목길 주황빛 늦은 꽃을 피워 올린 금목서 나무 아래
저녁노을은 그림자처럼 깔려
이 가을 나의 슬픔은 온통 붉은 빛이다.
오늘은 너 없는 나를 위해 술노래를 부르리니
그곳에서 잘 있어라. 그래,
다시 돌아간 그곳에서 잘 있거라. 그래,
나는 내일 황금빛 바람 불고
붉은 풀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서는 가을 들판에 서서
눈 감고 있어도 환하게 반겨 오는 태양빛의 소리를
그렇게 네 안부처럼 듣고 있겠다.
- 『이팝나무 가지마다 흰 새들이』, 한티재, 2021
감상: 레퀴엠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음악이다. 시인은 시집 뒤에 붙인 자신의 산문에서 레퀴엠을 쉼과 안식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음을 밝혀 두었다. 음악을 연주하며 고단한 영혼을 쉼으로 안내하는 천사의 역할이 시인의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시인은 그 천사에 대해 회의한다. 천사는 아파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천사 대신 시인이 직접 나서서 이번 레퀴엠을 연주하기로 했나 보다.
사실, 시인이 생각하는 천사는 따로 있다. “이념 없는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살당한 수많은 천사들, 힘겨운 노동의 현실 속에서 떨어지고, 불타고, 부서지고, 숨이 막히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천사들, 이유도 모른 채 물속에 갇혀 흰 파도가 된 어여쁜 천사들, 내 어머니 천사들, 일찍 떠난 내 동생 천사, 물대포에 머리 부서진 농부 아저씨 천사, 그리고 내가 식별하지 못한 수많은 별빛의 천사들…”이 그렇다. 시인에게 천사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고, 시인에게 정을 준 사람들이고, 아픔과 고통을 남 대신 더 많이 진 사람들이다. 지금 이 순간도 자본의 이익 추구에 밀려 안전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함으로써 소중한 생명들이 높은 데서 추락하고, 기계에 말려들고, 폭발물에 노출되고 부서진다. 연간 이천 명의 산업재해 사망자 수를 줄이기 위한 최고의 방안은 그 사실에 슬퍼하고 분노하며 그 죽음을 위로하는 마음이 공유되는 것일 테다, 고공 굴뚝에 있는 천사를 위해 의료 가방을 들고 사다리를 오르기도 했던 시인의 레퀴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만, 위의 시에서 호명한 천사는 시인 개인적 인간관계가 더 작용하고 있는 느낌이다. 가까이 있던 사람이 무슨 일에선가 세상을 더 살지 못하고, 그 사람이 부재한 현실은 시인에게 온통 슬픔이다.
그 슬픔을 환기하는 매개물은 금목서다. 금목서는 금빛에 붉은빛을 더한 주황색 꽃을 피우지만 슬픔의 눈으로 보면 그 꽃도 색이 바랜 낙엽 같고 지는 노을빛 같기도 하다. 그렇게 시인에게 슬픔은 붉은 빛으로 오지만 그 슬픔의 연주 끝에 너가 돌아간 저쪽의 기별인 양 “태양빛의 소리”를 반가이 듣는다. 그런즉, 레퀴엠은 죽은 자를 위한 노래도 되지만 죽은 자와 무관할 리 없는 살아있는 자신과 이웃의 영혼에게 들려주는 치유의 음이기도 한 것이다.
천사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을 갖고 있지 않지만 누군가의 아픔을 알아주고, 읽어주고, 나누기도 하는 곳에서 사람 냄새로 나무 향으로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인의 레퀴엠에 묻어나는 금목서 향을 느끼면서.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옥이네 집 / 전상렬 (0) | 2022.02.26 |
---|---|
몽유끽연도(夢遊喫煙圖) / 차영호 (0) | 2022.02.17 |
등나무의 지붕 / 정재원 (0) | 2022.02.07 |
옛이야기 구절 / 정지용 (0) | 2022.01.30 |
별이 빛나는 감나무 아래에서 / 피재현 (0) | 2022.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