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단오살구 / 김성중

톰소여와허크 2022. 5. 17. 16:50

단오살구 / 김성중

 

 

살구의 파아란 볼이

노랗게 주황으로 물들면

살구나무는 살구를 떨어뜨린다

 

담세정 살구는 씨알이 적지만 매우 달콤하고

무정식당 살구는 텅 빈 가스탱크 무서워서 힘이 없어 보이고

무정식당 주차장 모퉁이 살구는 국도 29호선을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에 시달리며 누르스름하게 익어서는 똑똑 떨어지고

관방제림 주차장 살구는 얼굴빛이 불그죽죽한데 마을 사람들이 장대로 후려 금방 사라졌고

계석대 살구는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겨우 보이고

황금소나무 식당 마당 살구는 풋살구를 떨구며 익어가고

백진각 옆 동정자마을 살구는 씨씨티비가 감시한다며 무서워하고

본때식당 살구는 내가 찾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며 익어가고

감나무집 살구는 노랗게 익어가는데 울타리가 쳐져 만날 수가 없고

만덕산 옥천골 법주사 입구 고목이 된 살구나무 소식이 궁금한 날

카페 커피파오 뒤 떨어진 살구가 농로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걸 우연히 보았네

 

고향을 떠나서는 무엇이 바쁜지

살구맛을 잃어버린 사람들

나는 살구씨를 모으느라 바쁜데

강쟁말 우리 집 살구나무도 꽃이 필 날이 있겠지

 

-『강신보 가래나무, 우리시움, 2022.

 

 

감상 김성중 시인은 교직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담양 강쟁리로 돌아왔다. 이전에 교육자로 사람답게 사는 길을 고민하고 안내했다면 귀향 이후엔 지역을 걸으며 지역의 삶과 자연을 품었다가 이야기로 푼다. 어릴 때부터 집 뒤의 대나무를 그렇게 좋아했다는 시인은 집에서 멀지 않은 관방제림의 여러 나무를 만나기를 좋아하고, 강쟁들의 버드나무 고목에도 맘이 설렌다. 가래나무에서 가래 떨어지는 기척까지 알아듣고 강쟁들을 건너서 가래 주우러 다니는 데도 부지런하다.

대나무, 가래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등 시인과 인연 있는 나무가 많지만 아무려나 1번 나무는 살구나무에게 양보해야 할 분위기다. 시인은 살구나무에 꽂혔다. 살구광에서 보듯 학교 재직 시에도 살구나무를 가꾸고, 살구를 따서 교사와 학생들과 나누기도 하면서 살구샘으로 불렸을 정도다. 한 해 살구 씨를 오천 개 넘게 모으고 아픈 살구나무를 위해 살구나무 관리 계획까지 짜는 정성을 보였으니 살구광이란 말이 전혀 과하지 않은데 위의 시까지 읽게 되니 비로소 살구광의 진면목이 보인다.

시인은 담양 지역 구석구석을 돌면서 살구나무의 위치, 주변 분위기, 성장 상태를 체크하고, 열매를 가늠해 보며 손에 담지 못하는 것은 눈으로 담는다. 무정식당 등 시에 언급된 살구나무가 있는 식당 이름도 정겹지만 커피를 판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단순하게 드러낸 커피파오란 카페 이름도 재미있다. 시인도 자신의 시 쓰기 정체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지역의 것을 기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자세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그냥 있었던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남들은 무심하게 지나기 십상인 것을 마음을 기울여 들여다보면서 평범한 살구나무가 특별한 살구나무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러한 창작 의도나 그 결과물은 지역뿐만 아니라 지역 안팎의 자산이 될 줄 안다.

김성중 시인은 고향집을 새로 수리하면서 살구나무를 심었나 보다. “어린 살구나무가 자라서 우람해지면 / 텃밭 가득 연분홍 살구꽃이 피고 / 살구가 익으면 그 살구를 따먹으며 / 황홀하게 세월을 보내게 될 집”(우리집)에서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단다. 시면서도 달달하게 익어가는 살구처럼 산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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