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점식, 『아트로포스의 가위』, 흐름사, 1981.
정점식(1917-2009, 성주 출신) 화가는 김환기, 김병기, 유영국 등과 함께 한국 추상화의 1세대로 언급된다. 대구 계성학교, 계명대학교 등에서 근무하면서 그림 창작과 수업을 병행하며, 4권의 에세이까지 남겼다.
『아트로포스의 가위』란 제목은 화가가 봤던 ‘운명의 세 여신’이란 조각에서 빌려왔다. 파손된 형태 그대로에서 작가는 더 큰 감동을 받는다. 세 여신은 각각 클로토(인간 운명의 실을 잣는 여신), 라케시스(실을 감는 여신), 아트로포스(운명의 실타래를 자르는 여신)다. 아트로포스는 이승과 저승, 이쪽과 저쪽의 운명을 가차 없이 자르는 가위를 손에 지녔지만 잘려나간 조각상에선 찾아볼 수 없다. 없지만 이어보고, 그려보는 게 작가의 상상력이긴 할 것이다.
『아트로포스의 가위』를 읽자니 1960, 70년대의 대구 풍물이나 인식을 엿보는 재미도 있다.
“오래 전부터 채전이라도 가꿀 수 있는 변두리로 옮겨보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조건이 허락하지 않는다. 인구과잉으로 들끓어 뒤지는 땅바닥은 참 흙은 없어지고 식물조차 번식 못하는 잡균과 오물로 메워진 이 불모의 황지를 향해 왜 삶들은 몰려드는지 모를 일이다. 대구의 명물인 감나무는 연탄이나 배기깨스의 탓인지 맺어서 떨어지고 꽃나무마저 뜨물이 맺혀 시들어 가는 이 불모의 도심을 사람들은 왜 몰려드는지 모를 일이다.”(1962)
인용 글을 읽고, 대구 인구 변화를 찾아본다. 1960년경 60만을 넘어서더니 2000년경 250만으로 정점을 찍고 1922년 현재 237만 정도로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다. 1960년대의 작가는 사과나무가 아니라 감나무를 대구의 명물로 꼽는다. 현재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감나무밭이 마을마다 있었을 것이다. 마당을 갖춘 집이라면 감나무 한두 그루는 으레 있었을 것이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여유 공간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당시를 이미 불모의 황지(荒地)라고 했던 작가가 동네 구석구석 들어찬 지금의 고층 아파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대구의 보수성 기질에 대한 언급도 눈에 띈다.
“나는 오랫동안 대구에 살면서도 대구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으로 대하고 그것을 느끼면서 살아왔다. 한국의 삼대 도시의 하나이면서도 도시적인 규모가 가장 갖추어지지 않은 도시라는 느낌과, 대구 사람들이 보수적이며 진취성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을 오랜 전통생활에 뿌리박고 있는 성격이라고 결론지워 보지만 풍토적인 특성이 크게 작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마저 든다.”(1979)
서울은 사랑방, 부산은 행랑방, 대구는 안방이라는 어느 외국인의 비유를 소개하며, 새로운 풍조에 너무 들뜨는 것도 걱정이지만 안방에 있으면서 밖을 내다보지 않는 것도 문제라는 인식을 화가는 보여준다.
정점식 화가가 읽은 책이나 예술 잡지, 당대 화가나 작품에 대한 평, 예술가들과의 교류도 흥미롭다. 이인성 화가의 그림과 삶을 짧게 언급한 후에, 팔공산을 좋아한 이인성이 그렸다는 그림의 행방을 궁금해 한다.
“비스듬한 언덕바지에 전면이 황갈색으로 물들은 어린 떡갈나무 숲을 그린 풍경이다. 겨울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말라붙어 있는 바삭바삭 소리를 낼 듯한 굳은 잎들이, 그것도 색의 변화도 없는 엘로오카(노란색?) 일면의 풍경이 무엇인가 그의 인생철학을 보여준 듯한 느낌으로서 지금도 그 감명이 식어지지 않고 그 작품의 행방이 궁금하다”(1972)
인용 글의 이인성이 그렸다는 떡갈나무 숲은 전시 도록에 나타나지 않은 걸로 보인다. 여러 작품을 제쳐두고 정점식 화가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작품인 만큼 어디에선가 나타나주면 좋겠다. 대표작 <사과나무>(1942)가 명덕초등학교 복도에 오랫동안 걸려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대구미술관에 소장된 전례가 있다. 이처럼 ‘떡갈나무 숲’도 더 극적인 서사를 쓰면서 관객에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계성학교 제자 박해동(영남대 명예교수)은 수업 시간에 할아버지 초상화를 정교하게 그렸나 보다. 뒷날, 정점식 화가는 이걸 기억하며 제자 작품전에 덕담을 보탠다. “박해동 교수의 설화성과 환상적인 그래픽 작품 속에서도 저 할아버지의 초상화의 재치가 되살아나오고 있어서, 나는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이런 묘사적인 힘이라는 것은, 어떤 분야의 미술을 하든 그 골격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이 밀도 높은 작품들 앞에서 감회를 새롭게 한다.”(1970)는 평에서 제자에 대한 정과 함께 화가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자질에 대해서 정점식 화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이중섭 화가의 대구 생활과 애정 표현에 대한 글과 함께 유치환 시인에 대한 언급도 있다. 화가는 유치환 시인을 인간미 있는 시인으로 기억하며 “시를 우리나라에서 처음과 마지막으로 철학의 상징에로 응결시킨” 바위의 고독을 지닌 시인으로 높게 평한다. 또한, 서운할 수도 있는 개인 인연도 풀어놓는다. 함께 시화전을 했으면 좋겠다는 얘길 듣고 그림까지 다 준비한 상태에서 서너 번 전시를 미루다가 그만 사고로 먼저 돌아가셨다는 얘기다. 운명을 가르는 아트로포스의 가위질이 어찌되든 유치환 시인이 저승에서 정점식 화가에서 술 몇 잔 샀으리라 싶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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