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소설> 세월

톰소여와허크 2022. 8. 16. 13:27

 

윤혁, 세월, 신세림출판사, 2022.

 

 

- “허위의식 없는, 위선과 편견 없는, 자유로운 이야기쓰기를 갈망해왔다는 작가의 단편 모음집이다. 허위의식이 없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처럼 소설은 작가가 성장해온 환경이나 작가가 지내왔던 공간에 대한 경험과 그 경험에서 파생되는 인간관계의 이모저모와 갈등 국면이 많다. 또 자유롭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의도처럼 등장인물을 지배하거나 특정 결론을 유도하려는 움직임을 애써 피한다는 생각도 든다.

10편의 소설 중 백자주병(白瓷酒甁)’1970년대 부산의 빈민가를 무대로 하고 있다. “동네 중심부에는 기차표 신발이라는 명칭의 신발공장이 중세 유럽의 성채처럼 동네를 내려다보며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기차표 신발공장담 너머에는 오래된 판잣집과 일자형으로 지어진 슬레이트집들이 방사형으로 연이어 지어졌다. 여러 개의 방을 급조한 다세대주택 격인 일자형 슬레이트집 내부에는 방 하나, 부엌 하나 형태로 연이어진 다세대가 살았다. 우리는 하모니까 구멍처럼 수없이 연결된 가구 형태의 기다란 슬레이트집을 하모니카 집으로 불렀다는 배경 묘사가 정밀한 구상화 같다. 당시의 마을 풍경이나 가구 구조뿐만 아니라 하모니카 집집이 보여주는 살림살이의 옹색함, 생계의 고단함이나 다툼, 삶의 애정과 부침이 지레짐작 되는 것이다.

실제 소설 내용에도 최씨 여자와 창호 엄마가 동네에서 대판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최씨 여자는 병신이란 말을 습관적으로 쓰는 형의 버릇을 혼쭐내준 여자다. 주인공(박철수- 작가는 주인공 이름으로 박철수를 자주 등장시킨다)의 형이 최씨 여자의 아이에게 병신이란 말을 썼다가 호되게 당한 것이다. 형에 대해선 최씨 여자가 할 말 한 셈인데 창호 엄마의 경우엔 싸움 원인을 제공한 최씨 여자가 상대를 더 세게 몰아세우고 무안을 주는 걸로 나온다. 당시 뉴스에도 언급된 살인청부업자의 길을 밟게 되는 최씨 여자의 사연은 그 자체로 인생의 한 단막을 압축해서 보는 듯하다.

단편의 제목인 백자주병의 주인은 박철수의 고모다. 고모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박철수 뒷방으로 이사를 오고, 그 고모를 찾아서 낯선 사람이 온다. 영문을 모르는 박철수는 고모 있는 곳을 알려주게 되고 아버지가 중간 해결자로 나선다는 이야기다. 고모는 차례상에 쓰는 백자 술병을 귀하게 여기는데 고모부의 유품이다. 보기 예뻐서 고모에게 달라는 것을 고모는 나중에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소설 말미의 한 대목은 이렇다. “주변에 존재하는 흔한 사람이 살인마가 되고, 생각 없이 행한 누군가의 행동이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타가 되어 그의 인생을 고통의 구덩이 속으로 빠뜨린다는 사실도 그랬다. 찾아도 보이지 않던 백자주병처럼 나에게는 그저 흥밋거리로 갖고 싶은 무엇이 어떤 이에게는 삶의 중요한 존재가치였다는 거다.

작가는 또 다른 단편 세월에서 군시절 박철수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사회에 나와서 만나게 된 이야기를 전한다. 그 사람은 젊은 시절의 실수를 빌지 않았고, 박철수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기회를 놓쳤다. 사건도, 사건 해결에 대한 기대를 품었던 시절도 지나가 버린 것이다. “세월은 예측 불가능하고 짐작이 도저히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만 깨닫는다. 작가는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이 생각났다는 쪽지를 내게 남겼다. 독서 목록이 늘어나니 머리가 아프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