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갑, 『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 파람북, 2022.
- ‘한 글자’ 이야기를 시작해서 그때그때 매조지한 것이 예순아홉 번에 이르렀고, 이를 묶어 산문집 『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이 나왔다.
목차를 보니 둘, 옆, 곡으로 시작해서 쫌, 볕, 참(慘)으로 끝난다. 이 중에 <옥(獄)>을 보니, 작가가 감옥살이 경력이 있고 그 시절, 아내가 될 사람의 희생도 있었는 줄 알겠다. ‘옥’은 한자 모양새처럼 개 두 마리가 말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꼴이란다. 감옥이 아니더라도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말과 말이 서로 보듬지 않거나 통하지 못하면 그곳이 바로 감옥”이며, 우리 사회가 혹 그런 꼴을 하는 경우가 없는지 작가는 묻는다. <연(蓮)>에선 갑질 중지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청소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자들의 태도와 막말을 비판한다. 이년 저년 소릴 들은 청소노동자들이야말로 세상을 정화하는 연꽃이라고 했다. 문득, 갑질의 주인공에게 개 두 마리를 붙여주는 게 정의라는 생각도 들지만 갑의 논리도 있을 테니 함부로 말하진 않겠다.
한 글자 중에 작가가 스스로 꼽는 것은 <숨>이다. 숨은 숲처럼 끝없이 호흡해야 한단다. “뱉는 입과 쓰는 손에는 뱉거나 쓰려는 사람의 깊이가 녹아있다. 입과 손을 함부로 부려선 안 될 까닭이 거기에 있다”고도 했다. 숨은 호흡이고 소통인데 정작 말이 나가고 들어오는 중에 호흡이 거칠어지고 소통이 막히는 일들이 적잖은 것이다.
한 글자 중에 내가 꼽는 것은 <꿈>이다. 꿈은 편파적으로 사랑을 받아 두 꼭지나 있다. 한 꼭지는 없는 것을 생각하는 꿈이다. “북과 남으로 천지사방에 장마당 열리는 꿈” 같은 게 그렇다. 꿈의 반대로 가는 듯한 현실 속에서 그나마 꿈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나 해야 할까.
또 다른 <꿈>은 상대적으로 현실적이다. 일찍 죽은 작가의 아버지는 그의 꿈에 등장해 술 취한 목소리로 ‘아빠의 청춘’을 부른다. 작가 자신의 꿈은 해리포터와 나니아 연대기에 빠진 집의 아이들에게 그만한 또는 그 이상의 판타지 동화를 쓰겠다고 약속한 일을 지키는 일이다. 하지만 사는 일에 밀리고 거기에다 <툭> 망월동에 떨어지는 꽃, 사월만 되면 잠을 잘 수 없는 어른의 <죄>를 더하면서 판타지로 쉽게 가지 못하는 인생이 되고 만다. 평균 연봉 1,340만원의 연극배우들이 언제든 무대에 대한 갈증을 갖고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먼 길을 돌아온 작가도 판타지 소설에 대한 목마름을 갖고 있다. 이제야 해갈할 기회에 닿아 있는 듯하니 그 결실물이 궁금하다.
책의 표지는 파울 클레의 <rough cut head>(1935)다. 발터 벤야민이 보관하기도 했다는 <new angel>(1920)이 연상된다. 발터 벤야민은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인생 도처에 훼방꾼처럼 등장하는 꼽추 난쟁이에 대해서 얘기한 바 있다.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아서 심술을 부리는 악동 이미지인데 만약, ‘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알아봐 주지 않는다면 표지 그림처럼 칼질로 대충 빚어진 머리를 하고 슬픈 눈으로 이쪽을 쳐다볼 것이다.(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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