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일, 『이규일의 미술 사랑방』, 랜덤하우스, 2005.
- 월간 《Art in culture》에 2년 간 동 제목으로 연재한 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연재 기간 중, 2003년 5월, 청강 김영기 화가가 돌아가셨고, 2004년 3월 김환기의 아내인 김향안 여사가 뉴욕에서 돌아가셨다. 2004년 4월 최순우 옛집 개소식이 있었고, 2004년 10월 삼성미술관 리움이 문을 열었고, 이영미술관에선 박생광 전시회를 개최했다. 머리말에 소개되기도 했던 일련의 일들을 저자는 예술가의 생애나 작품을 연결 지어 이야기해 주고, 예술 그 뒷이야기까지 보태면서 흥미를 자아낸다.
저자는 남정숙 여사를 인터뷰한 것을 바탕으로 변종하의 삶과 그림에 대해 얘기한다. 변종하(1926-2000) 는 대구 출신이며 계성중학교에서 서진달 선생에게 미술을 배웠다. 아내 남정숙은 신명여중 출신으로 이재에 밝아 남편을 적극 후원한다. 파리 유학을 주선하고, 성북동에 변종하미술관을 내는 결정적 역할을 해낸다. 변종하미술관엔 화가의 작품 150점과 고서화에 취미가 있는 부부가 수집한 고미술품 200여 점도 있단다. 요철 화가로 알려진 변종하의 작업에 대해선, “그는 화가이기 전에 목공예가나 전각가처럼 먼저 나무로 밑판을 만들고, 그가 그리고자 하는 형태를 나무로 오리고 조각하여 밑판에 붙인 후 그 위에 다시 올이 성근 마포를 래커로 고착시켜 이 마포가 원하는 피부가 될 때까지 계속 오일 칼라를 칠해 간다. 겉에서 칠하는 색이 아니라 속에서 우러나오는 색을 만들기 위해 무진 애를 쓴 것이다.”라고 구체적인 작업 방법을 소개한다.
변종하의 호는 석은(石隱)이지만 허참(虛參)도 종종 쓴다. 허무한 세상에 동참한다는 의미란다.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온 화가들이 잔류파니 도강파니 싸움질하는 것을 보고 ‘허참’ 하고 한탄했다는 소문도 있다. 책에 없는 얘기 중에, 돈키호테 시리즈 연작 중 <돈키호테 이후 – 독재자>(1971)가 문제 되어 중앙정보부로 연행된 상태에서, 독재자가 박정희 아니냐는 추궁을 당한 얘기가 떠돈다. 감금 위기까지 간 것을 육영수 여사의 연락을 받고 풀려났다는 소문도 있다. 관련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는 자기 서재에 박수근의 <고목>, 장욱진의 <모기장>, 김원용의 <문인화>를 걸어두고 완상했다고 한다. 저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혜곡 최순우와 간송 전형필도 삼불 김원용의 문인화를 격조 있게 보았단다. “문인화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 돈을 주고 팔고 산 게 아니라 그냥 정으로 주고받았던 그림”이라더니, 그림의 행방을 알려주는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김원용의 수필 『노학생의 향수』에 인용된 얘기인가 보다. 내용은 자기 집 벽에, 그림에 화제를 쓴 <오이도 송림도>(1958)를 걸어두었더니 어느 날 술에 취한 간송이 들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간송 서재에 있던 이 그림도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데 알고 보니 혜곡이 슬쩍 가져갔다는 얘기다. 몰래 가져간 것을 정이나 낭만으로 읽기도 했을 것이다.
조병화 시인 이야기도 비슷하다. 조병화는 그림 전시회도 여러 번 가진 화가이기도 한데 부산 피난 시절, 시집 『패각의 침실』을 내고 동료 문인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시인이 아끼는 영국제 파이프가 사라지고 없었단다. 금강다방에 모여 있는 어제의 멤버들에게 누가 남의 취미 생활을 망치게 하냐고 욕질을 했더니, 김환기 화가가 파이프가 너무 멋있어서 술김에 들고 나왔다고 자수한다. 조병화가 그날 파이프 하나를 새로 사서 화가에게 선물했더니 그 이튿날 답례로 김환기의 그림 한 점이 돌아왔다는 거다.
남의 애장품을 탐내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걸 만들어낼 줄 아는 솜씨 또는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는 눈까지 함께 인정하고 욕심내는 마음일 것도 같다. 사실이 그렇다고 하나 서로 모르는 사이에 정을 낼 수는 없다. 소장품이 돌고 도는 것도 그들 관계의 허용된 범위 안에 이뤄지는 것이지만 멋스럽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조병화 시인의 서울고 제자가 예전 국무총리였던 이수성 씨다. 예술원 회장이 된 시인을 위해서 예술원 회원들의 월 수당을 획기적으로 높여준 것을 저자는 여담으로 소개한다. 적잖은 돈을 종신수당으로 받는 예술원 회원 지원 제도에 대해 근래 따가운 시선도 있는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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