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윤·박경주, 『다시 내릴 비』, 2022, 정한책방.
- 박경주 작가의 산문은 일상의 여러 장면을 지나오며 그때그때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차분한 어조에 발랄한 정서로 교묘하게 직조해서 세상에 내놓은 글이다. ‘나’를 드러낸 수필이면서, ‘나’와 무관하지 않은 주변인물의 일면을 스케치하듯 그려낸 짤막한 사적 소설 같은 느낌도 준다.
“여름이면 / 좋아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들고 / 단골 커피숍에서 더위를 피하자”(「그대와 함께」 중)라는 작가의 시를 읽으니 작가를 처음 만났을 때가 얼핏 떠오른다. 이상화 시인이 태어나고 자랐다는, 오래된 라일락나무가 인상적인 지역 카페였는데,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야트막한 지붕의 주택을 약간만 손을 본 따스한 느낌의 카페”(「남자 이야기」 중)라고 묘사한 공간이 바로 그곳 같기도 하다. 그때 그 곳에서 작가가 추리소설을 읽었는지 어땠는지 기억은 없지만 라떼를 주문했는 줄은 알겠다. “순수한 커피 본연의 쓴맛을 선호하는 아메리카노 파와 달고 부드러운 맛을 좋아하는 카페라떼 파” 중에 자신의 기호를 분명히 했으므로. 그럼에도 기호는 바뀔 수 있다. 작가는 취향의 차이, 생각의 차이를 존중해야 할 것을 말하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기호를 얼마간 따라가게 되는 사정을 구수한 커피향처럼 풀어낸다.
작가의 실수담도 반갑다. KTX에서 좌석번호를 찾아가는 백발의 어르신을 마주보고 버스 안인 줄 알고 자리를 양보하려고 일어섰다가 민망해하는 모습이 그렇다. 나 역시 승차 날짜나 오전 오후 시간대를 착각해서 곤란을 겪은 일이 간간이 된다. 생각해 보면, 작가처럼 잠깐 민망한 쪽이 나을 것도 같다.
작가는 한때 할머니 댁에서 자란 경험을 회상하기도 한다. 당시 할머니가 정성껏 싸준 도시락이 오히려 고역이었다고 말한다. 어떤 때는 할머니 머리카락이, 어떤 때는 검은 프라이팬 찌끼가 밥과 반찬에서 수시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속도 모르고 도시락을 빠뜨리고 간 손녀를 위해 일부러 학교를 찾아와서 전해주기도 한 할머니. 그 손녀는 이제 작가가 되어 “그런데 할머니! 지금이었다면 예쁜 머리 두건을 선물로 드릴 텐데 말이에요”라며 시간에 따른 지혜와 여유와 재치를 드러내며 그렇지 못했던 과거 상황에 대해 미안해하지만 그때는 그때대로 자기 양식껏 사는 것일 테다.
이와 같이 이 책은 박경주 작가의 살아온 삶과 이웃을 대하는 시각이 따스하게 스며있는 산문이다. 또한 작가의 산문과 어울리는 김사윤 시인의 시가 여러 편 인용되어 있어 독자는 산문과 운문을 두루 오가게 된다. 속초 여행에서 별똥별(流星)에게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박경주 작가가 고백할 동안 김사윤 시인은 「유성」을 두고 이렇게 노래한다.
“별 하나는 잃은 하늘이 나를 내려다본다.
그대를 잃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운다.
남은 별들이 남은 그리움을 위로하며 빛났던가”
김사윤 시인은 “낡은 책들이 익어가는 냄새가 어머니께서 삶아 주신 고구마처럼 푸근하고 아늑” 했다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시장 변두리 ‘대명 책방’ 출신이란다. 그러고 보면 『다시 내릴 비』는 책 냄새 즐기고 비 좋아하는 사람끼리 한데 잘 어울려 결실한 책이라고 하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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