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역 / 김수상
유월의 한낮, 느티나무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네
첼란의 돌과 속눈썹과
검은 우유와 심장을 생각하네
늦은 당신은 더 늦어도 오지 않고
철길 너머에는
비를 몰고 오는 먹구름 몇 장
비는 다녀가도 당신은 오지 않네
푸른 돌을 매단 느티가
한낮의 흰 이마를 때릴 때
번쩍이는 잎들 거느리고
기차는 지나가네
나는 헌신짝처럼 남겨져
이젠 당신을 쓸 수가 없네
-『물구라는 나무』, ㈜여우난골, 2022.
감상 – 시인이 다녀간 금강역은 대구 금호강(琴湖江) 가의 역사로 보인다. 대구선 구간을 이동해서 2005년 신설된 역이지만 이용자가 많지 않아 현재 여객 업무가 중단된 상황이다. 바람이 종일 머물다 가는 쓸쓸한 이 공간에 변화의 조짐도 있다. 뒤편 금호강과 앞편 연꽃 단지 사이를 잇는 산책로를 조성하고 전망대를 설치하면서 주민과 손님의 발길을 기대하고 있다. 연꽃 필 때를 기다려 금강(琴江)역에 가도 좋겠지만 강 습지의 갈대를 지나는 바람이 거문고 소리를 내는지 귀를 기울여볼 만도 하겠다.
시인이 금강역을 찾은 유월 어느 날도, 흐린 날에 쓸쓸한 역사를 찾는 이는 거의 없었겠다. 무정차 구간이 되기 전, 기차로 오는 당신을 기다렸을 수도 있겠으나 그저 조용한 공간을 찾아서 챙겨온 시집 한 권을 익히고 싶었는지 모른다. 파울 첼란의 시집이다. 파울 첼란(1920〜1970)은 유대인으로 그의 부모는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되었다. 첼란 본인도 가까스로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왔다. 첼란은 그 고통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시를 썼다. 이후 정신 착란에 시달리기도 했던 파울 첼란은 지워지지 않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는지 센강에 투신해서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
파울 첼란을 만나는 시간, 금강역에 온 시인은 첼란이 브레멘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했던 말처럼 “시간을 뚫고 무얼 붙들어 보려고” 마음을 한 곳에 기울이며 당신에게 닿을 수 있는 언어를 고민하고 궁리하는 중은 아니었을까. 그 결과가 이 한 편의 시일 테니까 말이다.
위 시의 ‘돌’은 첼란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검은 우유’는 첼란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죽음의 푸가」에서 땅에 무덤을 파고, 공중에 무덤을 파는 중에 새벽부터 줄곧 마셔대는 걸로 나온다. 첼란을 고려하지 않으면, 김수상 시인의 “푸른 돌을 매단 느티”는 느티의 푸른 잎을 지나는 푸른 비의 이미지를 포착한 것으로 지나고 말겠지만 첼란이 얼마간 씌워진 돌의 이미지는 가라앉는 무게를 더하게 된다. 역 이름에 금강(琴江)이란 한자 표기를 생략한 것에서 또 다른 한자인 금강(金剛)에 생각이 미치게 한다. 금강은 돌이다. 금강은 불교에서 전하는 지혜의 말씀이기도 하다. 첼란의 돌이든 김수상의 돌이든 구체적 물성을 띤 것도 아니면서 현실로부터 멀리 떠나지 않고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하는 남다른 감각을 갖고 있다.
시인이 기다리는 사이, 속절없이 기차는 지나고 당신은 오지 않는다. 이때의 당신은 이미 지났거나 아직 오지 않은 인연일 수도 있고, 닿으려 하나 닿을 수 없는 언어일 수도 있고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그런 당신이 기차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곁을 주지 않고 지나고 자신만 헌신짝처럼 남겨졌다는 시인의 토로는 절대적인 인연, 지혜, 시(詩)에 닿지 못하는 거리감을 짐짓 더 아프게 노래한 것이기도 하겠다. “이젠 당신을 쓸 수가 없네”라는 말은 지극한 아픔을 동반하면서도 묘한 감미로움이 남는다. 인연은 돌고 도는 것, 더 나은 인연이나 적당한 언어를 찾을 때까지 당신이란 존재가 저만큼 유보되어 있는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속눈썹’이 등장하는 파울 첼란의 「시간의 눈」이 그렇듯이 김수상의 「금강역」 역시, 시의 내용을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 중에도 울림이 크고 서정이 물씬 느껴지는 시 한 편이다. 먹구름 몇 장 아래 시집을 펼쳐 두고 빗방울 몇 점 맞게 하는 서정이 부럽다면 가방에 시집 두어 권 챙겨서 때를 기다리면 좋을 것이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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