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초, 『시는 늙지 않는다』(신석초 문학전집2), 융성출판, 1885.
감상 – 신석초 시인(1909〜1975)은 1935년 정인보 선생 집에서 이육사 시인(1904〜1944)를 처음 만난 후 십 년 가까이 둘도 없는 막역지우로 지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서 찾아본 책이고 이육사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았지만 두 사람 관계는 시간을 두고 좀 더 공부해볼 필요를 느낀다, 두 사람이 같이 잘 아는 이병각(1910〜1941) 시인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수확이다.
이육사가 경기 말을 쓰려고 하는 편인 반면에 안동 지척이라고 할 수 있는 영양 출신 이병각 시인은 사투리를 대놓고 쓰면서도 전통이든 인습이든 간에 가문의식에 대한 저항이 컸다고 한다. “늬, 조상 뼈다귀 작작 팔아묵어라. 퇴계 뼈다귀가 앙상하겠구나.”라는 말은 주위에서 퇴계 후손으로 육사를 대우해주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고 내뱉는 말이란다. 이런 말을 나이도 대여섯 살 많은 이육사 앞에서 종종 내뱉었다고 하니 이병각의 기질을 짐작해볼 수 있고, 그 정도쯤까지 받아줄 수 있는 육사의 아량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육사와 신석초는 명륜동 신석초 집에 만나서 명동 쪽으로 움직일 때가 많았다. 이병각 사촌형이 운영하는 무장야(武藏野) 다방(뒤에 ‘무화과’로 바꿈)에 주로 갔다고 한다. 1941년 몸을 혹사한 이병각은 성모병원에 입원했고, 폐를 앓은 이육사도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신석초가 면회 갔을 땐 이병각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신석초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문화부장을 지내며, 한국의 문화, 예술, 사람, 음식 등 다방면의 이야기를 기사화했고 사후 이 전집에 수록된 걸로 보인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과정에 발표 지면이나 날짜가 빠져 있어 글 쓴 시기를 종잡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석굴암 등 문화재 보완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느 잡지에 실린 외국인 기고를 소개하는데 언제 적 서울 모습인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서울에 날아갈 듯한 추녀를 가진 세계에 드문 전통적인 한국 가옥이 점점 없어지고 케이크 상자를 포개놓은 것 같은 고층건물로 아름다운 하늘이 자꾸 좁아지고 있는 것을 매우 섭섭히 말하고 있다”는 내용을 두고 다른 단서로 추정해보니 1970년에 쓴 글이다. 1970년의 서울 도심의 변화를 보았던 외국인과 신석초가 지금의 서울을 본다면 할 말을 아주 잃을 게 분명하다. 전집에서 ‘고층건물’을 ‘고충건물’로 오타를 낸 것이 본인의 진심은 아니었는지 물어도 답을 들을 순 없겠다.
예술과 외설의 차이를 말하며,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 의 경우 발매 금지와 재판까지 이어졌지만 결국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했다. 강희맹의 『촌담해이』, 송세림의 『어면순』도 성(性을) 주제로 한 소화(笑話)이면서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에로티시즘을 승화한 작품으로 꼽는다. 에로 문화에 대해 메스를 대는 것이 지나치게 되면 창조 의욕이나 표현의 자유를 해칠까 두렵다고도 했다.
신석초는 특히 유머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유머는 “마음의 안정과 정신의 여유를 가진 이의 쇄락(洒落)한 심정에서 나오는 말의 샘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기지와 양식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말하자면 지식·취미가 고상하고 인생을 달관하고 세상의 까다로운 난관을 잘 조정할 줄 아는 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이한 모습”이라고 했다. 쇄락이란 한자가 낯설어서 검색해보니, 기분이나 몸이 상쾌하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물 뿌릴 쇄’니 시원한 것은 알겠지만 ‘떨어질 락’은 왜 상쾌한 걸까. 스스로 바닥까지 가는 걸 개의치 않아야 함께 웃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화가 배렴과의 인연도 주목 된다. 배렴은 문기가 있고, 남에게 모진 소리 못하고 빙긋빙긋 웃지만 세상의 저속한 것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기질이 있다고 평했다. 계동 중앙중 정문 못 미처 골목에 배렴의 집이 있었고, 신석초는 마치 이육사와 그랬듯이 배렴과도 마음을 통하고 죽마고우가 되어 드나든다. 어느 날 배렴은 홍매화를 한 장 그리며 신석초 의향을 물어 그림에 ‘홍매원주인’이란 글씨를 써서 내준다. 신석초는 애지중지 그림을 수장하다가 ‘홍매루주인’으로 글자 하나를 바꾸어 줄 것을 부탁하며 그림을 다시 맡겼다가 배렴의 죽음으로 그림조차 돌려받지 못한다. 이육사에게 받은 난초 그림 한 장은 신석초가 잘 보관해서 이육사문학관 주최 전시에 공개되고 있다.
신석초는 1943년 신정, 큰 눈이 내렸을 때 이육사와 함께 청량리에서 홍릉 임업시험장까지 답설한 기억을 좀처럼 잊지 못한다. 현재는 홍릉 수목원 내 국립산림과학원 자리다.
시편을 모아놓은 ‘신석초 문학전집1’을 편다. “저 임아 천고(千古) 원한을 / 말치 말아. / 사람은 가도 탑은 남아/ 영구히 빛나노라”(「불국사탑1」중), “산도 깊고 / 세월도 깊었는데 / 네만 남아 빛나메라”(「불국사탑2」중)는 구절을 읽으니 탑을 그리는 신석초의 마음속에 이육사가 있음이 느껴진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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