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산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톰소여와허크 2022. 12. 26. 21:28

괴테(박영구 역),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푸른숲, 1998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들여놓고도 이탈리아 갈 일도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있어서인지 좀처럼 진도를 내지 못했다. 미적미적 나서도 결국 끝에 닿게 되는 건 괴테의 힘일 것이다.

괴테(1749-1832)17869월부터 19개월 간 이탈리아 여행에 나선다. 여행 중 1년 이상은 두 번에 걸쳐 로마에 체류한다. 괴테는 여행 전에 로마와 다른 도시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공부한 상태이고 여행 중에도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 지역의 특징과 풍속, 자연과 식생, 건물과 유적지, 조각이나 그림, 만난 사람까지 세세하게 기록한다. 그런 중에 자기가 본 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주변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는 일도 멈추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여행과 실질적 관련이 없는, 자신의 작품 구상, 퇴고, 발표까지 부지런히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실성의 대명사라 할 만하다.

괴테가 방문한 도시 중, 베네치아, 로마, 나폴리를 따라가 본다.

 

이탈리아 북구 트렌토, 베로나를 거쳐 베네치아에 도착한 괴테는 산 마르코 광장 인근의 숙소에 머문다. “내 방의 창문은 높은 집들 사이의 좁은 운하를 향해 나 있다. 창문 바로 밑에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가 하나 걸려 있고, 그 건너편에는 좁고 번잡한 골목이 있다고 했다. 산 마르코 광장의 두 기둥 사이를 빠져나왔을 때 보이는 두 개의 섬과 대운하의 모습에 대해서 언급하며 당시에도 동판화 모습으로 많이 봐 왔을 풍경이라고 했다. 지금은 인테넷 검색창에 산 마르코 광장 풍경정도만 쳐도 개인 블로그나 사진들이 끝도 없이 따라 나온다. 이런 이유로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를 굳이 읽지 않아도 정보가 모자란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다만 괴테라는 이름이 보증해주는 감성과 지성의 깊이를 생각하거나 인간 괴테 자체가 궁금하다면 놓았던 책을 다시 잡아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대목이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고독을 이제야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완전한 이방인이 되어 군중 속을 헤치고 돌아다닐 때보다 더 진한 고독이 느껴지는 곳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아마 단 한 사람밖에 없을 것이며, 그와 당장 만나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문구는 여행의 묘미를 느끼게 해준다. 또한 이십대 중반에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음에 따라 일찍 유명세를 치렀던 괴테가 서른 후반에 이르러서 어떤 마음상태였는지 그 일면을 짐작해보게 되는 문구다.

볼로냐 여행 시에는 라파엘로의 <성 체칠리아>를 실제 본 것에 감격하며 독일의 화가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그 중 알브레히트 뒤러가 베네치아까지 와서 판단 착오로 악당 같은 목사들과 거래를 하여 몇 달 동안 허송세월을 한 것을 불쌍하게 생각한다. 뒤러의 네덜란드 여행도 고생의 연속이었나 보다. 그런 예술가들처럼 괴테 자신도 나는 그렇게 불쌍한 바보 같은 예술가를 생각하면 끝없이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에 비해 내가 자기 관리를 조금 더 잘한다는 것만 다를 뿐, 그의 운명과 나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같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뒤러의 <자화상>을 찾아보면 그림 속 인물이 조금 더 불쌍하게 보이는 효과도 있다.

 

괴테는 베너치아 답사를 끝내고 볼로냐, 페루자 등을 거쳐 로마에 닿는다.

내 젊은 시절의 모든 꿈들이 지금 이 순간 내 눈앞에서 생생히 되살아나고 있다. 내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최초의 동판화아버지는 일찍이 로마의 조감도를 현관 마루에다 걸어놓으셨다를 바로 지금 내 눈앞에서 실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며 감격스러워하더니 모든 것이 내가 상상하던 그대로이고, 또한 모든 것이 새롭다고 했다.

이처럼 괴테에게 여행은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거나 새로운 것을 깨닫기도 하면서 이전 생각을 조정하거나 앎을 깊게 하는 과정이다. 여행자 괴테는 이후 여행자의 길잡이기도 하다.

로마의 시스티나 예배당에선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천정화를 봤고, 성 베드로 성당에선 지붕까지 올라가서 사방을 조망하는 시간을 갖는다. 시스티나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도 늘 새로운 것을 마주하고 그것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다 줄 것을 요구한다고 느낀다. 그런 요구에 빠져나올 궁리를 하는 게 아니라 괴테는 빙켈만의 고대 예술사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써놓은 것을 부지런히 읽는 방법밖에 없다고 못박는다.

 

로마에서 나폴리와 시칠리아섬까지 둘러보고 괴테는 다시 로마로 돌아오는 일정을 밟는다. 나폴리에선 극과 극 체험이 공존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괴테는 화가 크니프와 동행해서 나폴리 만에서 카프 미네르바로 가는 선상에서 일몰의 장관을 즐긴다. 그 풍경은 자신의 전 여행 기간에 만끽했던 모든 것과도 맞먹을 만한 정도였다고 말한다. 멀리 베수비오 화산의 증기 구름도 목격하고 밤이 되어 베수비오 화산의 구름과 구름띠가 붉게 타오르는 장면을 넋을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

그런 중에도 배는 조류에 휘말려 카프리 섬 쪽으로 떠내려가고 급기야 섬을 빙빙 돌면서 암초에 부딪칠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다. 아우성과 소요 속에 괴테는 어릴 적부터 죽음 자체보다는 무질서한 혼란을 더욱 혐오해 왔던기질로 성모 마리아와 그의 아들에게 기도할 것을 주문한다. 승객들은 잠시 진정되는 듯했으나 배의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다가 가까스로 조류로부터 벗어난다. 괴테의 요구와 기도가 도움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괴테는 여행 시에 참고했던 폴크만의 기행문에 대해서 훌륭하고 쓸모가 있다고 하면서도 사실과 다른 점이 있다고 꼬집기도 한다.

예를 들면 그는 나폴리에는 일없이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34천 명은 된다고 말해 누구나 그렇게만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내가 남쪽 지방의 사정을 여러 방면으로 직접 알아본 결과, 그것은 하루종일 조바심을 내며 애쓰지 않는 자를 모두 게으름뱅이로 간주하는 북부 지방 사람들의 관점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발견하게 되었습니다.”며 실제 실업자로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 증거로 어린 꼬마들이 어떻게 돈벌이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진술함으로써 듣는 독자들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현상을 파고드는 괴테의 관찰력과 태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며 이 여행기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으로 꼽을 만하다. 나중엔 미술품에 대한 폴크만의 견해에 대해서도 불충분하고 불확실한 평가일 뿐이라는 괴테의 비판이 한 번 더 이어진다. 이처럼 괴테는 싫은 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인간관계에 대해 언급한 편지글에서도 작은 신발을 신으면 제 발이 아플 뿐이란 표현을 쓴 걸로 보아, 관계를 맺고 끊는 데 단호한 것 또한 괴테의 일면이겠다. 그렇다고 괴테가 큰 신발이란 보증은 물론 없다.

 

여행 중 괴테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화가 티슈바인과의 우정과 미묘한 감정 변화, 자신을 귀한 손님으로 한결같이 대우해주는 앙겔리카와의 우정도 그러하고 무엇보다 연애 감정을 갖게 했던 밀라노 여자와의 만남과 이별이 독자의 관심을 끈다. 이런 사연들이 괴테의 삶과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괴테가 골상학에 빠져든 것도 형태를 통해 인간을 보고자 했던 괴테의 집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괴테가 길게 인용해 두고 있는 로마 사육제 이야기 중 일부를 옮긴다.

코르소 가가 점점 더 활기를 띠게 되고, 평상복을 입고 산책하는 여러 사람들 사이로 어릿광대가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병사들이 포폴로 문 앞에 집결한다. 새 복장을 갖춘 그들은 말 탄 장교의 인솔하에 악기를 연주하며 질서정연하게 코르소 가를 따라 행군한다. 그리고는 즉시 거리의 모든 입구를 장악하고 주요 광장의 요소요소에 몇 명씩의 위병을 세워 모든 시설을 감시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괴테가 로마를 방문한 이백삼사십 년 전에도, 사람이 붐비는 축제일 것 같으면 요소요소에 경찰을 두어 질서 유지를 도왔다는데 이를 소홀히 한 이즈음의 실수와 그 대가가 무겁기만 하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