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생각 / 우남정
책꽂이를 또 하나 사야 할까
표지를 보고 목차를 훑고, 책상 위에 책이 쌓여 간다
그 위에 또 그 위에
해가 지고 저녁이 오고 나는 침침해졌다
읽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책을 책꽂이로 옮긴다 또 쌓인다 읽다 만 책들이 늘어 간다 다시 읽고 싶은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붙인다 행간의 어디쯤에서 길을 잃는다 접어 놓은 모서리에 쥐가 난다 책 제목이 버킷 리스트처럼 줄지어 꽂혀 있다 『백년의 고독』을 다시 읽을 확률은 얼마일까 수십 년 한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매일 읽어도 어렵다 정독한 척하지만 대부분은 오독이다 시집 속에서 시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시인의 이름에 포스트잇을 붙인다 수박은 없고 수박 겉핥기가 있다 빠르게 스쳐 가는 것들, 눈 맞출 사이 없이 꽃이 진다
책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은 굳어진 생각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저녁
누구라도 제대로 사랑해 본 적 없는 것 같아, 밤이 쌓인다
멀어져 가는
그를 불러 세우고 보니 낯선 사람이 돌아본다
- 『뱀파이어의 봄』, 천년의시작, 2022.
감상 – 책을 잘 버리지 못하는 것과 포스트잇을 사용하는 독서법이 우남정 시인과 같다는 데서 동질감을 느낀다. 지금처럼 책 읽고 감상을 끼적일 때 참고하고픈 대목이 나오면 포스트잇을 붙인다. 시인처럼 다음에 다시 읽고 싶은 부분이 있어도 포스트잇을 붙인다. 책에 포스트잇을 붙이면 미련 없이 포스트잇을 뗄 자유가 생기거니와 무엇보다 책을 깨끗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 우남정 시인과는 특별한 인연도 있다. 1997년, 『원미동 사람들』 이 사는 곳 가까운 고등학교에 신규 발령 났을 때 교무실 맞은편에 앉아서 일 년 간 배움을 주신 선생이다. 바쁜 중에도 늘 책을 가까이하는 모습이었는데 왠지 『백년의 고독』도 그때 읽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우남정 시인은 해놓은 말이 있으니 언젠가 『백년의 고독』을 다시 시작하겠지만 난 아니다. 『백년의 고독』을 읽고 남긴 예전 메모를 보니, 소설 속 등장인물의 공통점으로 한때 불타오르는 열정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깊은 고독에 놓여 있었다고 적어 두었다. 몇 번씩 읽었다는 별쭝난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백년의 고독에 다시 다가설 엄두가 안 생기는 것이다.
우남정 시인은 독서든 사람이든 그 읽기가 만만치 않다고 고백한다. 쌓아둔 책을 다 읽지 못하고, 읽어도 수박 겉핥기에 그칠 때가 많은 걸 느낀다. 책은 연하여 쌓이고, 의욕보다 먼저 시간이 지나가 버리는 기분에 “누구라도 제대로 사랑해 본 적 없는 것 같아, 밤이 쌓인다”고 자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자조는 “모서리에 쥐가 난다”는 표현처럼 묘한 떨림이 있다. 아마도 깊은 고독, 깊은 영혼에서 길러진 아름다운 시구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우남정 시인은 책을 읽고 포스트잇을 오늘도 붙일 것이다. 더러 사람 이름에도 포스트잇이 닿아 있단다. 따지고 보면, 익숙한 그 누구도 모두 타인이다. “낯선 사람” 앞에 선 듯한 느낌이야말로 그 사람에게 가는 새로운 길이란 생각이 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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