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시)

길을 위하여 / 이수

톰소여와허크 2023. 2. 23. 13:36

 

길을 위하여 / 이수

 

꽃 진 라일락 가지가 드리우는 그늘 아래 앉아

공원 내 음악방송에 귀 기울여 보기도 하며

머언 거리에서 서성거릴

피멍 든 내 삶의

경골의 구둣소리를 듣는다

세상 속 어떠한 절망도 사람을

끝장 낼 수는 없다고 중얼대며 가는 길 위에서

따가운 오월의 햇빛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들고 잠시 바라보면, 등성이로 구름을 몰아가는

바람의 귀엣말 같은 돌돌거림

바윗길 옆, 오두마니 앉아 있는 내 표정에서

얼른 슬픔을 읽어 내지 못한 사람들은

셔츠 앞자락을 펄럭이며 저만치

앞서 가 버리고

백련암 오르는 길 옆,

바위틈마다 촘촘히 박힌

날개이끼들을 밟을 새라 조심하며

나는 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길고도 먼 길, 나는 이 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피로와 숨가쁨이야말로 이미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기억과 기억 어디쯤과

몸비빔한 내 몸뚱아리에서 부풀어 오른

새로운 힘의 비유일 터,

어스름 설핏 내린 비탈길을

실안개 싸여가는 계곡을

어둠이 묻어나는 풍경소리 그 모두를 지나

또는, 위험의 모든 벼랑 끝을 건너뛰어 이제

우리가 스쳐왔던 곳마다

철쭉꽃이 피고 지고 순식간에

오월의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위협이

될 수 없는 몸에서 마침내

나를 지우고 나에게 이르는 길

저 등성 너머에서 순결하게 빛나는

길 하나를 위하여

나는 더 이상 추억에 대항하지 않을 것이다.

 

-『속아가미로 호흡해 보는 사랑, 전망, 1996.

 

감상 대개의 헌책방에 시집 코너는 있게 마련이지만 대체로 다른 책보다 시집에 먼지가 더 인다. 찾는 이가 드물어서 그럴 것이다. 헌책방 이름이 무색하게도 실제 7,80년대 시집은 거의 없고, 90년대 시집도 많지는 않다. 이런 사정은 도서관도 마찬가지긴 하다.

옛 시집이 있다고 해도 너무 익숙한 이름은 지나게 된다. 그렇다고 익숙하지 않은 이름에 바로 끌리는 경우도 많지 않다. 먼지를 먹으면서 한두 페이지 건성으로 읽다가 그 자리에 꽂아둔다. 어쩌다가, 그야말로 우연찮게, 아니면 운명적으로 한 페이지, 한 구절이 눈에 잡히면 그 시집과 새로운 인연이 생기는 거다. 이수 시인의 속아가미로 호흡해 보는 사랑로 그렇게 해서 만났다.

시집 속 다수의 시편들은 서울 인근과 먼 지방으로의 여행 속에서 얻은 시다. 시인은 풍경을 언어로 바꾸는 묘사에 능하면서도 이전의 기억과 내면의 상처를 환기하고 다독이는 듯한 포즈를 취한다.

그 옛날 시인이 걸었던 백련암 가는 길은 어디였을까. 뒤 페이지에 강진에서의 여름이 이어지는 걸로 보아 강진 백련암(백련사)이 우선 떠오른다. 현재는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길이 정약용과 혜장스님 혹은 초의선사가 동행했던 길로 많이 알려져 있다. “세상 속 어떠한 절망도 사람을/ 끝장 낼 수는 없다는 구절은 기약 없는 유배 생활을 견디며, 강학과 저술 활동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려는 정약용의 삶에도 그대로 대응되지만, 무엇보다 시인이 이곳에 내려온 상황과 결부되어 있을 것이다.

시인은 금방 드러날지도 모를 슬픔의 덩어리를 안고 길을 걷는 중이다. 시인은 이 길이 길고도 먼 길임을 예감하지만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피로와 숨가쁨새로운 힘으로 인식할 만큼 시인은 의식적으로 건강성을 지향한다. 깊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길을 내딛은 그 순간 희망도 시작된 걸 느끼는 것인지 모른다.

강진에서의 여름에서 시퍼런 여름의 장대비 아래/ 한결 또렷해진 내 기억의 그늘이/ 욕망이 데불고 선 세상의/ 윤곽을 지우기를 나는 바란다고 했으니 시인은 여행을 통해 쓸데없는 욕망을 버리는 연습 중이다. 여행의 끝에 나는 더 이상 추억에 대항하지 않을 것이다란 묘한 문장으로 시인은 끝맺음을 해두었다.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아프고, 배우고, 지나면 될 일이다. 그걸 미련하게 키우고 애써 집착해서 쓸데없이 자신을 소비하는 일이 없도록 내버려둔다는 의미로도 읽게 된다. 춘천 출생이고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는 시인의 다음 행보는 인터넷 공간에선 좀처럼 확인되지 않는다. 헌책방이든 라일락 그늘이든 어디든 걷고 있는 시인의 뒷모습을 그려본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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