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학교 / 오탁번
소월이나 미당 생각하면
시 쓸 맛 영 안나겠지만
재주는 좀 없어도 꾸준하게
쓰고 또 쓰다 보면
내신 1등급 5% 안에는 들지 몰라
1등 2등 다툴 만한 고은이나 김춘수가
사람이다 말씀이다 하면서
3등급쯤으로 자진해서 나가는 걸 보면
너희들
흰소리 작작 하고
이슬비 맞으며 홀로 울면서
빗방울 찍어서 손바닥에라도
가련한 시 몇 줄 쓰고 또 쓰면
지용쯤은 친구 삼아도 되지 않을까?
박용래하고는 맞술 나눠도
큰 흉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내신성적이 뭐 대순가
실기시험으로 결판이 나는 거야
이 잡지 저 잡지로 너비뛰기
평론가 대학교수까지 높이뛰기
모든 욕 먹으며 오래달리기
심사위원 알음알음 턱걸이 하기
이쯤되면 소월이나 미당도
뒷발질로 넘어뜨리고
현대시사의 주동인물이 될 수도 있것다?
(학생들 와글와글 선생에게 삿대질)
안 되겠다
시인학교는
오늘
당장
문 닫는다
나는 보따리 싸겠다
네미랄
-『생각나지 않는 꿈』, 미학사, 1991.
감상 : 시와 소설을 쓰는 오탁번 시인(1943-2023)은 충북 제천군 백운면 출신으로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읜다.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삼십 년 재직한 후 시인은 자신이 졸업한 초등학교 분교 건물을 구입해서 원서헌(遠西軒) 간판을 단 문학관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오탁번이 마흔 후반에 발표한 「시인학교」는 김종삼(1921-1984)의 「시인학교」(1977)를 배경에 깔고 있다. 오탁번과 김종삼이 인연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춘분에 핀 난초를 보며, 천의무봉한 “꾸미지 않아도 그냥 자연스러운/ 천상병이나 김종삼의 시”(「춘분(春分)」, 『1미터의 사랑』, 1999)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오탁번이 김종삼의 「시인학교」에 얼마쯤 머물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종삼의 「시인학교」엔 막걸리를 실내 반입한 김관식을 비롯해서 휴학생 김소월, 김수영이 소환된다. 김종삼 자신도 출석해서 친구 전봉래와 소주를 마신다. 전봉래는 전쟁 통에 피난지인 부산의 스타 다방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시인이다. 이렇듯 김종삼의 「시인학교」에선 틀에 맞춘 수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잔 등 강사진도 아예 결강 상태인 그래서 더 매혹적인 학교다.
오탁번의 「시인학교」는 김소월만 중복되어 나타날 뿐 새로운 학생으로 대폭 물갈이 되었다. 김소월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는 서정주(1915-2000)다. 오탁번은 젊은 날 자신이 습작했던 서정주를 “왕겨빛 그리움”(「미당을 위하여」, 『1미터의 사랑』)으로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권력에 맹종했던 서정주의 삶과는 별도로 자신에게 시로 영향을 주었던 것을 부정하지 않은 것이다. 「시인학교」의 또 다른 인물인 고은 시인이 자신을 등단시킨 서정주를 비판하며 생전에 인사하기도 거부했던 사정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시의 1, 2등을 다툰다는 김춘수(1922-2004)는 5공화국 국회의원 배지를 달면서 흠이 생겼고, 서정주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고은 역시 성추문이 문제가 되어 노벨 문학상에 가까이 갔던 명성에 금이 갔다. 서정주와 고은의 시는 학교 교과서에서도 사라지고 있으니 시의 일선에서 존재감을 뽐내던 시절이 금세 아득해지고 있다.
오탁번은 “소월이나 윤동주보다 오래 살고 있는 시인은 모두 불행합니다”라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그나마 아주 길게는 살지 못한 정지용(1902-1950), 박용래(1925-1980)가 벗하고 싶은 시인으로 존중받고 있다. 오탁번은 해금 조치 이전, 생사가 불분명한 채 월북 문인으로 분류된 정지용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를 하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때 “지용을 꿈꾼 저녁마다 창 밖에서 바람소리가 들렸다”(「지용에게,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1985)고 했다. 울보 시인으로 불리는 박용래는 김종삼 「시인학교」 출신의 김관식을 떠올리게 한다. 논산 출신에 강경상고 선후배 사이인 박용래와 김관식은 매일 술을 마시다시피 한 애주가이면서 시와 생애 양 쪽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오탁번 시인은 짐짓 강사의 목소리를 빌려 시를 일류, 이류, 삼류로 구분 짓고 어울릴 만한 경지를 목표치로 두면서도 작품 외적인 것으로 대우받는 풍토까지 드러낸다. 이런 시인학교라면 문 닫는 게 낫다는 게 모두의 생각이었으니, 열자마자 휴강인 1기 김종삼 「시인학교」의 뒤를 충실하게 따른 셈이다. 옛 「시인학교」에 대한 향수에 새로운 「시인학교」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정작 시인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유인만이 진짜(?) 시인이란 공식은 아직 진행형이다. (이동훈)
'감상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기 / 최란주 (0) | 2023.03.28 |
---|---|
아방가르드 / 권수진 (0) | 2023.03.26 |
길을 위하여 / 이수 (0) | 2023.02.23 |
한 잎의 女子 / 오규원 (0) | 2023.02.17 |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생각 / 우남정 (0) | 2023.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