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길 / 강우현
한때 곁길로 가던 나뭇가지들
톱날이 간섭하자 다시 길을 찾았다
나무의 길은 하늘에 있었다
겨울잠을 깬 어린 나뭇가지 하나
옆구리에서 불쑥 튀어나와
길 아닌 길을 걷고 있다
저것은 위험한 길
바람의 눈이 반쯤 감기자
아직 나무의 길을 익히지 않은 애송이가
철없는 아이처럼 반항하고 있다
함께 할 수 없는 저 길
찔려본 사람들은 다시 톱날을 들이댈지 모른다
작년 옆 나무에서 잘린 가지 하나도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꽃을 피우고 갔다
가고 싶은 길은 그렇게 목숨을 걸어야 한다
-『반항을 접은 노을처럼』, 우리시움, 2023.
감상 – 가로수는 곧잘 가지치기 대상이 된다. 이유도 다양하다. 가로수가 가게 간판이나 차량이 오가는 것을 가린다든지, 비바람에 찢어진 가지가 도로를 덮쳐 위험할 수 있다든지 하는 말엔 부분적으로 공감이 간다. 지저분해 보인다든가, 외래종이라든가, 꽃가루 알레르기를 유발한다든가 하는 말엔 얼른 납득되지 않는다. 수족을 자르고 깔끔하게 만들어 놓은 게 더 민망할 때가 많고, 토종이라는 것도 한때는 외래종일 가능성이 높은 데다 그런 구별 없이 지구종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생태계 순환에도 유리해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특정 나무가 알레르기의 원인이란 것도 과학적 규명이 부족해 보이고 나무의 다른 가치를 깡그리 무시하며 특정 나무를 거덜 내는 일방적 행태도 우려가 된다.
과수원 나무는 또 다른 이유로 가지치기 대상이 된다. 더 큰 과실을 맺기 위해서 선택적으로 가지를 키우고, 일손이 달린다는 이유로 위로 자라지 못하도록 가지를 꺾어 내리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이 또한 과수 농가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것을 이해하지만 나무가 원하는 그림은 절대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론, 인공적인 가지치기나 솎아주기를 하지 않아도 나무가 저절로 가지의 폭이나 길이, 열매의 개수나 크기를 조정한다는 말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숲속 나무를 관찰하면, 옆 나무가 있는 쪽으로 가지를 최소화하고 다른 쪽으로 수세를 확장한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나무 자신도 스스로의 컨디션이나 주위 환경에 따라 열매를 많이 내서 오래 품기도 하고, 열매 수를 줄여서 일찍 놓아주기도 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나무의 일은 나무에게 맡겨두는 게 더 현명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강우현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나무에 톱날을 대는 것에 대한 평소 생각을 적는다는 게 조금 길어졌다. 시인이 목격한 것은 옆으로 자라는 곁가지를 베어낸 나무다. 곁가지가 지나는 행인의 눈을 위협한다는 민원도 있었을 걸로 본다. 곁가지를 베어낸 게 나무에겐 폭력과 마찬가지라고 해도 나무 자신도 삶을 이으려면 주변에 적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무의 길은 하늘에 있었다”는 걸 개안(開眼)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남은 삶을 사는 게 불행한 마음을 더는 일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나무의 길’에 대한 속내를 짐짓 드러내지 않는 중에도, 강요받거나 수용해버린 나무의 길을 따르지 않고 새로 옆으로 길을 내는 어린 나뭇가지를 걱정스럽게 또 기특하게 바라본다. 걱정스러운 것은 “길 아닌 길”로 나섰다가 또 한 번 외부 힘에 무력하게 꺾이는 것이고, 기특한 것은 그럼에도 자기 의지로 “가고 싶은 길”을 가려는 당찬 각오에 대한 찬탄과 응원의 마음이 있어서다.
그것은 길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겁박하는 시대에 불복하고 저항하며 끝내 “위험한 길”을 선택하여 “마지막 꽃”을 피우고 마는 것은 어쩌면 시인 내면의 지향점일 것도 같다. 투신과 반항을 통해서 새로 태어나려는 시인의 마음이 뜨겁기도 하고 그만큼 시인의 길이 환하게 트이는 느낌도 받는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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