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사의 광두일귀
무림일기9 / 유하
단 일 검으로 삼 장 거리의 나뭇잎까지도 베어버린다는
공전절후한 필살 검법의 소유자 건곤일검 호용비도
자신은 검법의 검 자도 모른다며 소매를 휘휘 저었다
공수도 한 방이면 온 무림을 시산혈해로 만들 수 있다던
냉면나찰객 왕쇠도
불초는 그런 말을 해서도, 할 수도, 한 적도 없었다고
뜨거운 차 한잔 마실 동안이나 홍알댔다
이렇듯 일세를 풍미한 고수들의 오리발 검법이 난무하는 가운데 열린 무림 청문대회
그러나 정작 모든 재앙의 장본인인 광두일귀는
삶은 만두피 하난 만진 적 없다는 그의 처 독서시 염자홍과 함께
한때 그가 탄압했던 소림사에 은거하며
공수무극파천장의 독랄하고도 광오한 구결 대신
공즉시색 색즉시공을 끝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림사의 허망함과 함께 깊어가는 소림사의 겨울
당금에 들어 본좌는
장강의 앞 물결은 뒷 물결에 밀릴 수밖에 없다는
무림의 진리를 새삼 뼈아프게 깨닫고 있소
허나 만일 더 이상 본좌를 용담호혈로 밀어붙인다면
무림계의 그 누군가와 동귀어진* 할 수밖에 없소
헐 헐 헐
* 동귀어진 일 검으로 상대방과 함께 죽는 검법의 한 종류
-『무림일기』, 문학과지성사, 2012. / 중앙일보사, 1989.
감상 – 내게 유하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2004)로 기억되는 영화감독이다. 『무림일기』(1989)는 그의 첫 시집이다. 시집 속 영화 이야기를 시의 소재로 삼은 몇 편의 작품 중 「그로잉 업」에서 “나의 그로임 업을 영화를 찍는다면 어떨까/ 칙칙한 흑백 화면?/ 교복 후크 풀어 헤친 채 이빨 사이로 찍찍 침 뱉어가며”라고 하더니 실제 그대로 된 것이다. “밤늦게 떡볶이 먹다 떡볶이 집 아줌마한테 유혹당한” 경험도 영상으로 담겼는데 그때 떡볶이 집 아줌마 역을 했던 김부선 배우도 영화 바깥의 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무림일기」1∼9 시리즈는 주로 5공 시절의 분위기를 무림에 비유해서 쓴 시다. 광두일귀는 누가 봐도 전두환을 의미하는 것이니 유하 시인으로서는 부담을 가졌을 법하다. 1987년 이후 민주화 분위기에 편승해서 5공 비리와 5.18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까지 진행되었지만 정권을 이어받은 이가 전두환의 육사 동기이자 신군부의 주요 인물이었던 노태우였고, 5.18 진상 규명도 책임 소재를 묻지 못하고 관련자들의 “오리발 검법”이라는 변명과 발뺌 끝에 최소한의 처벌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광두일귀가 구사했다는 ‘공수무극파천장’은 자신의 손발처럼 움직인 공수부대의 행동을 풍자한 것이겠다. 파천장은 멀쩡한 자기 지붕을 깨며 그 파편을 스스로도 맞는 어리석은 무공이 아닐 수 없다. 시민 혁명을 유혈 진압한 공수부대 주도의 참상은 권력의 만용에 가까운 결단과 이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 얼마나 민간의 삶을 파괴시킬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5공 청문회 후 전두환은 소림사 아닌 백담사로 피신을 가서 2년 가까이 지내게 된다. 한때 한용운 스님이 기거하면서 『님의 침묵』을 썼던 사찰이다. 유하 시인은 전직 대통령의 얼굴과 말씨에서 반성과 성찰 대신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비장과 결의를 보았을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동귀어진 한다면 그 대상은 후계자로 밀었다가 결과적으로 자기 발등을 찍게 되고 만 후임 대통령일지도 모르겠다.
2021년 두 전직 대통령은 한 달 간격으로 나란히 죽었다. 흔히 사지(死地)로 생각하는 용담호혈(龍潭虎穴)도 따지고 보면 용의 집이요 호랑이 집일 뿐이다. 정작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두 분은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그것으로 위로가 되지 못하는 억울한 혼과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음을 함께 기억해야겠다.
무림일기를 쓰던 이십대 후반의 유하 시인은 육십대가 되었다. 그가 보는 지금의 무림은 어떤 모습일까. 검 한 자루로 불의한 세상을 쓸면 좋겠지만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검이 곧 불의가 되고 마는 것도 낯선 풍경이 아니다. 저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필살기가 흥행엔 좋지만 당사자에겐 이미, 반은 죽음인 셈이다. 큰 죄 짓지 않고 작은 죄 뉘우치며 사는 평범과 평화가 더 요긴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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