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글(책)

<그림 산문집> 방방곡곡 사람냄새

톰소여와허크 2024. 1. 9. 00:22

 
 
김주대, 『방방곡곡 사람냄새』, 시와에세이, 2023.
향숙 김밥, 은주 칼국수. 언젠가 들렀던 가게 이름이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부부가 영업을 같이했을 것이고 가게 이름의 주인이 누구냐고 실없이 물었다가 안주인의 이름을 딴 것이란 얘길 들었다. 지나는 길에 한 번 들른 게 전부인 까닭에 가게의 영업 상황을 알 수 없지만 왠지 친밀감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는 인상을 갖고 있다.
훈기네상회는 김주대 시인이 방방곡곡을 다니다가 만난 슈퍼의 이름이다. 시인의 그림 산문집 『방방곡곡 사람냄새』는 훈기네상회 이야기로 시작된다. 슈퍼 주인인 아버지와 슈퍼 이름의 주인인 아들이 주고받는 말을 재미나게 소개한다. 사탕을 탐내는 아들과 소주를 축내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이야기 끝에 아들은 자랑스러운 아들은 못 돼도 착한 아들이 되겠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이미 착한 아들이 된 것처럼 뿌듯해 한다.
취재자인 시인은 “훈기네상회 앞에 앉으면, 자랑스러운 인물이 권력자나 부자가 아니라는 걸 되짚어 생각해 보게 된다. 착한 인물과 자랑스러운 인물이 동의어가 되는 세상을 소망한다”고 했다. 실제 취재한 내용과 별개로 시인의 상상력을 보태서 쓴 글이지만, 시인이 생각하는 사람냄새가 뭔지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착한 인물이 대우받는 사회가 사람냄새 나는 세상이란 것이다. 권력자나 부자가 당장 그 권력과 부를 어쩌지 못하더라도 착한 사람을 받들고 배워서 착한 권력자가 되고, 착한 부자가 되면 공동체 전체가 참하게 착해질 것인데 시인이 종종 화난 시늉을 하는 것은 세상이 그렇지 못해서 일 것이다.
시인은 시와 산문에 능하면서 그림에서도 경지를 이루어 놀라움을 준다. 진정성을 바탕으로 권위와 가식과 질서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걸 자신의 시론으로 삼았던 시인은 그림을 대하는 자세도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전시 작품에 휴대폰을 가까이 대어 찍는 사람들에게 유리 표구를 하지 않아 반사광이 없으니 편하게 찍으시라고 한다. 자신의 그림이 위로가 된다면, “그 위로의 자리에 작가인 나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어쭙잖은 나도 세상으로 참 많이 확장되고 연결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고백을 들으니 권위를 버린 자리에 사람냄새가 난다는 걸 알겠다.
시인은 책임지지 않는 권력과 그 주변에서 행세하는 세력에 대해 비판엔 주저함이 없다. 간접적인 풍자보다는 단순하고 격한 표현을 골라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전달한다. 또한 시인은 부당한 것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함께 “잘나지 못한 사람, 억울한 사람, 가난한 사람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와 같은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시인은 시를 쓰고 붓을 든다고 했다.
바닥을 멀리하는 듯한 태도를 시인은 미워한다. 바닥에 가까워지기 위해선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 무엇보다 바닥을 사랑해야 한다. 시인의 그림 중에 허리 120도 숙인 할머니가 새끼 고양이와 눈 맞추는 퍽 보기 좋은 그림이 있다. 시인은 우주의 어느 ‘가느다란 순간’으로 적어두었는데 “삶의 그늘과 그림자는 모두 바닥에 깃든다”는 시인의 지향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한 편의 그림, 한 편의 시가 아닐 수 없다.
향숙 김밥, 은주 칼국수, 훈기네 슈퍼, 훈이 만화방 등등 이름을 걸고 하는 가게는 소박함과 함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바닥의 정서가 느껴져 좋다. 한마디로 사람냄새 물씬 풍긴다는.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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